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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평점 :
이 책은 관계와 사랑, 상처와 죽음, 편견과 불평등, 배움과 아이들 등 다양한 범주의 주제를 종횡무진하지만 이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방이다. 저자는 질문을 던져준 독자, 동료, 친구에게 보내는 늦은 답장이라고 한다. 지식 축적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실천적 관점에서 깊이 읽기를 시도한다고 했다.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고 펜을 잡는 시간 밤은, 사유가 시작되는 시간,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 다른 내가 되는 변모의 시간이다. 이러한 뜻을 모아 ‘해방의 밤’을 제목을 정했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리베카 솔닛이 쓴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만났다. 솔닛은 자신의 이야기를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한다. 30대를 지나고 나니 인연의 지형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40대는 책 쓰는 일과 글쓰기 수업이나 책 만드는 일로 만나는 이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기도 한다.
관계와 사랑에서 일이 바빠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 연락이 잘 안되다 보니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유명인이라서가 아니라 생활인이라 날마다 하던 걸 하기에도 급급해서라고 했다. 나이를 먹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다. 책을 내기 위해 편집자와 주고받은 편지는 무려 100통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보고 왜 책 얘기만 했는지 자책감이 들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일상 글감’으로 성폭력 사례가 자주 나온다. 글에 등장한 가해자는 괴물, 짐승, 악마가 아니라 거의 친족, 상사, 선배, 이웃이었다. 함께한 수업에는 자신을 양성애자로 정체화한 한 학인도 있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성소수자가 자기 딸이라면 혼란과 충격이 크겠다. 이들과 섞어 살면서 배운다. 사랑도, 용기도, 글쓰기도.
인간관계는 공손이 기본이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한테 막 해도 된다고 여기는 지극히 폭력적인 양육 관습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고 있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물리적 체벌만 폭력이 아니라, 빈정거림이나 비하 발언도 언어폭력, 방문을 쾅 닫거나 설거지를 할 때 탕탕거리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정서폭력,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은 예고폭력이라고 한다.
노동자가 쓴 노동자 이야기, 여성 노동자의 배움과 저항이 깃든 영화를 보고 오래도록 울림을 남겼다. [전태일 평전]을 열 번도 넘게 읽었는데 책에서 ‘평화시장 시다’로 뭉뚱그려진 여공들, 청소녀 노동자들, 조연처럼 언급된 그들의 존재를 개인으로 상상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서부터 엄마들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 육아 정보와 양육의 고충을 나누니 좋았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대화 내용이 달라졌다. 사교육과 입시 대책으로 직진만 있는 욕망의 진도가 버거웠고, 엄마들을 만나고 오면 나만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속이 시끄러웠다. 약도 없는 원인 모를 두통 같은 불안은 책읽기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저자는 책을 내고부터 도서관 대출인이 아니라 강연자가 되어 도서관에 출입한다. 열람실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며 저기가 내 자리인데, 생각하지만 강당의 맨 앞 한가운데로 인도된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면한 글 한편을 무사히 잘 쓰는 일이라고 그것만이 계획이고 목표였다.
[해방의 밤]은 책과 사람에 대한 오래된 믿음에서 비롯됐다. 한 사람이 읽은 책을 알려주지만 독후감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불러오는 책의 이야기다. 저자는 나를 살린 책들이라면 남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월든]에서 “빠른 여행자란 자기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나를 살린 책들이라면 남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저자가 소개한 책들을 한 권씩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