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7 - 조정래 대하소설, 등단 50주년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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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오로지 죽어나가는 것은 우리였다.

수많은 나의 누이,형들.이모,삼촌이 무참하게
그리고 우리의 부모가 그냥 죽었다.
극악무도한 반드시 지옥에 있을? 서청놈들한테
어제까지 독립투사인 나를 고문하던 그 순사한테
내 민족인 북한인민군에게
코쟁이의 무차별 폭격으로
한강다리 폭파로 공중으로 뜨서 찢겨진 채로
뒷산으로 끌려가서 손이 묶인채 집단학살로

아아!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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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을 멸종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잔인한 살육을 해가며 미합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수많은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혹독하게 부려 그 나라의 경제기반을 구축해서 세계적인 강국이 된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으로가득 찬 역사를 반성하거나 죄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색인종에 대해 끝없는 우월감을 갖는 동시에 강대국 국민이라는 자만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 P476

그런 그들의 의식이 강한 것은 정의,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는 자는 위대하다는 제국주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가치를 지배논리로 바꾸면서 그들은 제국주의 지배가 베푸는 혜택을 맘껏 향유하고 있었다.  - P476

인디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틀림없는 침략자들이면서 학살자들이었고, 흑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또한 확실한 생명강도들이면서 착취자들이었고, 진정한의미의 인류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용서될 수 없는 종족살해범이면서 인간들이었다.  - P476

"듣고 보니 그게 그렇군. 아이구, 한국인들 미개한건 아프리카수준이야. 그 변소를 좀 봐 구더기가 드글드글한 게, 우엑!"
- P478

"변소는 아무것도 아냐.그똥으로 농사를 짓는단말야. 논가에커다란 똥구덩이를 봤잖아? 이들은 똥을 먹고 자란 쌀을 먹고, 오줌을 먹고 자란 채소를 먹는 야만인들이야. 이 나라에선 우리가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 아이구, 더럽고 징그러워!" - P478

"그러니까 일본에서 들었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거 뭐랬지?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그리고……."
"거짓말 잘하고, 도둑질 잘하고, 그 담에가…… 응 그렇지 무질서하지." - P478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현오봉의 눈은 휘둥그렇게 크게 뜨여있었다. 그리고 눈을 껌벅여 다시 뜨고, 또 껌벅여 다시 떴다. 그러나적의 수는 아까보다 분명배이상 많아 보였다. - P500

처음보다 훨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간도 40여 분을 끌어적을 물리쳤다. 그러고나서 20여분이 지났을까. 적들이 또 공격을 감행해 왔다. 그런데 그 수가 두 번째의 배로 늘어나 있었다. 현오봉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사병들은 완연히 동요하고 있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숫자도 사람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들리게 했지만, 두차례의 방어로 화력도 거의 소모상태였던 것이다. - P501

두 번째보다 전투는 더 치열해졌고, 이쪽에서도 사상자를 내며한 시간이 넘게 싸워 적들을 가까스로 밀어냈다. 그러나 전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적들은 다시 몰려왔는데, 적들은 세번째보다 배로 불어나 있었다. - P502

적들의 그런 공격법은 이쪽의화력을 모두 소모시켜 버리는 한편으로 심리적 교란까지 일으키게하는 이중적인 것임을 그는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 P502

현오봉의 입에 물린 마지막 소리였다.
현오봉의 연대가 전멸한 이틀 뒤에 UN군사령관 맥아더가 ‘중공구의 월경 성명‘을 발표했다. - P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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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내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지혜롭고 부드럽게 이끄시고나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 P288

고장(場)이 20리 남았다는 지점에서 오른쪽이 바위절벽이고,
왼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인 길을 만나게 되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굽이쳐 흘러가는 물줄기는 충만강 상류였다. 그 절벽길의 넓이가 갑자기 좁아져 보였다. 한쪽이 낭떠러지인 데다가, 마음이 급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든 때문이었다. - P465

국경선, 북쪽 땅의 끝- 이학송은 압록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700리를 흘러내리는 강, 단순히 물이 모아져서 흐르는 물길이 아니라 반도땅의 수만 년 세월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강, 이 강 앞에 이런 암담한 심정으로 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 P468

"마침내 중국이 참전을 한 겁니다."
어둠 속에서 이학송이 말했다.
"이 동무 예상이 적중했어요. 우린 이제 희망이 있군요."
김미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시다, 만포가 얼마 안 남았소."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이학송의 말이었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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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있고 나서, 다윗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쭈었2 다. "제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이주해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주하여라."
"어느 성읍으로 가야겠습니까?"
"헤브론으로 가거라."
- P274

유다 주민들이 헤브론으로 와서 다윗을 유다지파의 왕으로 삼았다. - P274

한편, 사울의 군사령관인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길르앗, 아셀,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의 왕으로 삼았다. 그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ㅇ다 - P274

22 아브넬이 다시 말했다. "돌아가거라. 계속 쫓아오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내가 네 형 요압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느냐?"
23-25 아사헬이 계속 따라오자, 아브넬은 무딘 창 끝으로 그의 배를찔렀는데, 얼마나 세게 찔렀던지 창이 등을 뚫고 나왔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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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서술했듯이 연산군에게 상속된 성종의 유산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삼사의 위상이 제고됨으로써 정치적 정립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다.  - P34

다시 말하면, 그것은 왕권의 제약을 의미하는 정치 구조였다. 유산은 상속과 함께 처분할 권리도 주어진다. 연산군은 자신의유산을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고, 즉시 적극적인 처분과 강제적인 변형을 시도했다.  - P34

아울러 그에게는 이런 공식적이며 정치적인 유산과 함께분노할 만한 개인적 원한도 물려졌다. 그것은 모후의 사사賜死였다.
이 두 사안은 서로 별개였지만, 그 뒤 연산군은 둘을 밀접하게 연관시켜해석하고 처리했고 그런 중대한 판단 착오는 거대한 정치적 혼란과 파국을 야기했다. - P34

윤기견은 세종 21년(1439)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왔다. 그는 11명의 합격자 중 10등의 성적이었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때 3등으로 급제한 사람이 조선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문신의 한 사람인 신숙주申叔舟(1417~1475) 였다는 것이다(이때 신숙주는 22세였다. 같은 기수의 합격자끼리는 많아도 10세 이상 차이 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 윤기견의 생년을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 P36

그러나 윤기견은 이런 두 측면 모두에서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판단은 그와 함께 성종의 국구였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수긍할 만하다. 성종의 첫 정인혜왕후 한씨(본관 청주)는당대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明(1415~1487)의 딸이었으며, 윤씨가 폐출된 뒤 계비에 오른 정현왕후 윤씨(본관 파평坡平)도 병조참판과 영돈녕부사를 지낸 윤호(1424~1496)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 P37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폐비 윤씨의 가문은 조선전기의 주요한인물인 이승소 · 신숙주 · 마천목 등과 혈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일정한지위를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런 가격은,
넉넉지 못한 경제적 상황이나 아버지 윤기견의 경력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왕비를 배출한 집안에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 P38

궁지기(宮]로 출시했다(그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궁지기는 경국대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인 단종 1년(1453) 10월 10일(계사)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다시 1년 반 뒤 세조를 왕위에 추대하는 정치적 격변을 주도해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의 불우한 처지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운명을 일거에 뒤바꿨다.  - P41

이후 그는 성종 18년(1487) 73세로 사망하기까지 이조 ·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을 두 번씩 역임하고 원상으로재직했으며, 네 번의 공신책봉(정난靖難·좌익佐翼·익대翊戴·좌리佐理)에서 모두 1등공신으로 선정되는 유례없는 경력을 달성했다. - P41

이런 성취와 함께 권력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했는가 하는 측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예종과 성종의 국구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벼슬과 공신 책봉은 그래도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다소 건조하고 공식적인 보상이라면, 왕실과의 혼인은 그야말로 혈연으로 맺어지는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클 수 있었다.  - P41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와 달리 이번에는 예기치않은 놀라운 행운이 찾아왔다. 세조 13년(1467) 1월 12일(기묘) 한명회는자신의 넷째 딸을 잘산군과 혼인시켰는데,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갑자기 붕어하면서 바로 그 잘산군이 왕위에 추대된 것이었다.  - P42

잘산군은세조의 맏아들이었지만 세조 3년(1457) 19세로 요절한 의경세자世子(그 뒤 성종 6년 2월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의 둘째 아들로 당시 12세의어린 나이였고, 특히 세 살 위의 형 월산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승계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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