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서술했듯이 연산군에게 상속된 성종의 유산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삼사의 위상이 제고됨으로써 정치적 정립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다.  - P34

다시 말하면, 그것은 왕권의 제약을 의미하는 정치 구조였다. 유산은 상속과 함께 처분할 권리도 주어진다. 연산군은 자신의유산을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고, 즉시 적극적인 처분과 강제적인 변형을 시도했다.  - P34

아울러 그에게는 이런 공식적이며 정치적인 유산과 함께분노할 만한 개인적 원한도 물려졌다. 그것은 모후의 사사賜死였다.
이 두 사안은 서로 별개였지만, 그 뒤 연산군은 둘을 밀접하게 연관시켜해석하고 처리했고 그런 중대한 판단 착오는 거대한 정치적 혼란과 파국을 야기했다. - P34

윤기견은 세종 21년(1439)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왔다. 그는 11명의 합격자 중 10등의 성적이었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때 3등으로 급제한 사람이 조선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문신의 한 사람인 신숙주申叔舟(1417~1475) 였다는 것이다(이때 신숙주는 22세였다. 같은 기수의 합격자끼리는 많아도 10세 이상 차이 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 윤기견의 생년을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 P36

그러나 윤기견은 이런 두 측면 모두에서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판단은 그와 함께 성종의 국구였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수긍할 만하다. 성종의 첫 정인혜왕후 한씨(본관 청주)는당대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明(1415~1487)의 딸이었으며, 윤씨가 폐출된 뒤 계비에 오른 정현왕후 윤씨(본관 파평坡平)도 병조참판과 영돈녕부사를 지낸 윤호(1424~1496)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 P37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폐비 윤씨의 가문은 조선전기의 주요한인물인 이승소 · 신숙주 · 마천목 등과 혈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일정한지위를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런 가격은,
넉넉지 못한 경제적 상황이나 아버지 윤기견의 경력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왕비를 배출한 집안에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 P38

궁지기(宮]로 출시했다(그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궁지기는 경국대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인 단종 1년(1453) 10월 10일(계사)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다시 1년 반 뒤 세조를 왕위에 추대하는 정치적 격변을 주도해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의 불우한 처지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운명을 일거에 뒤바꿨다.  - P41

이후 그는 성종 18년(1487) 73세로 사망하기까지 이조 ·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을 두 번씩 역임하고 원상으로재직했으며, 네 번의 공신책봉(정난靖難·좌익佐翼·익대翊戴·좌리佐理)에서 모두 1등공신으로 선정되는 유례없는 경력을 달성했다. - P41

이런 성취와 함께 권력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했는가 하는 측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예종과 성종의 국구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벼슬과 공신 책봉은 그래도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다소 건조하고 공식적인 보상이라면, 왕실과의 혼인은 그야말로 혈연으로 맺어지는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클 수 있었다.  - P41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와 달리 이번에는 예기치않은 놀라운 행운이 찾아왔다. 세조 13년(1467) 1월 12일(기묘) 한명회는자신의 넷째 딸을 잘산군과 혼인시켰는데,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갑자기 붕어하면서 바로 그 잘산군이 왕위에 추대된 것이었다.  - P42

잘산군은세조의 맏아들이었지만 세조 3년(1457) 19세로 요절한 의경세자世子(그 뒤 성종 6년 2월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의 둘째 아들로 당시 12세의어린 나이였고, 특히 세 살 위의 형 월산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승계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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