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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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소설을 읽을 때는 첫 문장과 끝 문장이 무엇인지 유심히 새겨보는 습관이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로 시작하여, “정신없이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 했다.” 로 끝이 난다. 작가 가와바타는 우리에게 머릿속으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오도록 유도하며, 자신의 시선 안에 비춰지고 있는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만든다. 칠흑 같은 어둡지만 쌓여있는 눈 더미에 비쳐진 달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새벽녘을 얼마나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겠으며, 그 시선을 하늘로 이끌어서 보여주는 은하수는 또 얼마나 자신의 가슴을 저미는 아름다움이었을까? 가와바타가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한국인에게 유명한 유미가 출연한 ‘신 설국’이라는 영화를 봤다. 눈으로 뒤 덮인 공간을, 작가의 표현을 잠시 빌려 작은 방울 소리를 온 몸으로 안고 들어오는 기차의 만남은 자연과 기계문화가 만들어낸 최고의 아름다운 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작가는 그 시선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공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와무라, 고마코의 두 가슴속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저 차가운 가슴으로 고마코를 대하지만 고마코의 진실 된 뜨거운 마음으로 조금씩 자기에게 당면한 현실에 때론 고민을 하기도,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더하기도 하는 시마무라의 내면. 한 남자의 약혼녀지이지만 새 애인이 있는 남자를 위해서 게이샤가 되어 그들을 부양하면서도 그 현실을 피하려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고마코라는 한 여인의 내면. 우린 그들의 가슴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의 서정문학의 대표작이자 시작점이 된 작품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눈이라는 것이 처음엔 차갑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알 수 있듯이 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있으면 나중에 오히려 주위 공기층을 형성해서 안은 따뜻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설국이라는 배경을 통해서 차갑기만 했던 두 주인공의 마음이 서로를 통해서 조금씩 따뜻해져가는 그 과정을 나타내기 위한 최적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본 최고의 서정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나의 감성에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예전에도 일본 문학을 접할 때는 이런 기분이었는데 일본 특유의 디테일한 감정표현을 읽어내기에는 아직까지 나의 내공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낸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이 작품은 작가의 뛰어난 묘사, 즉 들여다보기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조금씩 나의 생각과 감정을 시적표현으로 풀어내는 것을 시도하고 있는데 문장 하나하나 놓치기 안타까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잘 소화할 수 있게 꼭꼭 씹어 먹어보아야 겠다.

 

많은 평론가들에게 설국의 첫 문장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최고의 첫 문장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하루빨리 이 문장을 넘어서는 첫 문장을 만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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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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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둘 다 둥글며 둘 다 은은한 색으로 빛난다. 난 생각했다. 책 속에는 달과 6펜스에 대한 비교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언급조차 없다. 하지만 왜 이 책의 제목은 ‘달과 6펜스’인지 참으로 궁금했었다.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책의 뒤에 있는 작품해설에 나온다.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6펜스, 속세를 벗어나서 자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달. 둘 다 인간의 삶이라는 젊에서 참으로 닮아있지만, 다를 수밖에 없다. 6펜스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에게 이 6펜스는 아무런 존재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눈앞에서 자신을 비춰주고 있는 은은한 달빛 한 줌에 위안을 얻고, 그 동안 살아온 삶을 다시 되새겨볼 뿐이다. 우리 삶의 본질은 과정에 있는 것인가, 영원한 평형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죽음에 있는 것인가? 이것도 우매한 질문일 수도,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도 인과적인 관계가 있으니깐. 이렇듯 ‘달과 6펜스’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지만 같을 수밖에 없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고흐와 함께 살았던 고갱. 나는 고흐의 삶은 ‘영혼의 편지’를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었지만, 딱히 고갱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 찰나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고갱의 재해석 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함께 했을 그 순간, Yellow House를 다시 떠올려 볼 수밖에 없다. 미술가들의 협동조합을 꿈꿨던 고흐, 하지만 이 책 속 스트릭랜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예술가들은 그저 자신을 혼자 놔두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놔두기만을.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기에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또 한 가지 짊어져야 할 책임감을 부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며, 고갱은 Yellow House를 떠나고 만다. 하지만 이 둘이 함께 했던 순간이 둘 다 불멸의 미술가로서 재탄생 하는 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고흐는 ‘별 헤는 밤’으로,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로. 둘 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그 삶을 자신의 화풍으로 풀어내었고, 죽은 후 더욱더 위대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의 연자매는 느리게 돌지만 가루는 아주 곱지요」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켜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버린 삶을 살다간 사나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빠른 성공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묵묵히 자기 속도로 꾸준히 달려간 사람의 인생은 어느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곱디고운 가루들의 집합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살아가면서 주인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남들의 시선에 하나둘씩 맞추기 시작했다면 타히티 섬에서 작업한 작품이 천지창조를 넘어선 그 무언가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주인공이 스트릭랜드의 삶을 비판하지만, 그저 스트릭랜드는 콧방귀를 뀔 뿐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스트릭랜드를 비판하지만 그것은 그저 사회적 통념이 빚어낸 도덕일 뿐. 스트릭랜드는 도덕 위에 군림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윤리를 따라서 살아갔으며, 그 윤리대로 평생 살다죽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후에는 그를 잘 모르던 사람들마저도 그 삶을 존경하기에 이른다. 이 어찌 삶의 모순이자 역설이 아니겠는가? 우린 도덕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고, 사회 규칙과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것을 때로는 무시하고 짓밟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다. 결국 도덕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창조해 낸 것일 뿐인 것이다.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 탄생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삶을 살다간 이들은 이렇게 무언가를 창조해냄에 이르게 되며,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로서 그 안에서 그것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흐릿한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찬란한 태양처럼 빛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지금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일까? 지혜로운 이들은 점잖게 자기들의 길을 간다. 하지만 참으로 점잖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딴죽을 걸기 시작하며 자기의 영역 안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려고만 한다.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신의 영역 안에 많은 이들을 끌어 들임으로서 안정감을 꾀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서로의 길이 있을 뿐인데 말이다. 서로가 자기의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너무나 평온하고 조용하며 초연한 곳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것은 더 이상 안정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창조한 이들을 만날 때 마다 내 가슴 속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는 것을 그저 가만히 놔둘 수가 없다. 나는 내 삶을 창조할 것이며, 사회라는 유기체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왔을 때는 자신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서로의 삶으로 존재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라는 개념은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여야만, 우리 아래에서 조금씩 약해진 개인도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버티며 버텨주며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예술가의 혼을 나는 끊임없이 갈고 닦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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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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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 특히 요즘 시대엔 더욱 더 그런 것 같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포장을 해서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그 기대보다 덜한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이 그들을 기대감 있는 인물로 만들었던 것일까? 그런 부분을 콕 집어서 잘 소개해준 책이라고 본다.

 

나는 과거 “지나치게 쾌활한 아이”로 불렸었다.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극도로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내향성 평가를 해보면,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성격의 스펙트럼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아주 넓은 편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데 큰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이 점은 나에게 아주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혼자서 하는 작업도 아주 좋아라하고, 독서모임같이 함께 하면서 소통하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200명이 넘는 조직을 이끄는 것도 무리 없이 나서서 잘 수행하며, 혼자서 감당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독도 상대적으로 잘 견뎌내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내향성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강화되어간 느낌이 적잖아 있으며, 군대에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더욱 개발이 된 것 같다. 내가 누군가를 닮고 싶어서 흉내 내었던 이들은 이상하게도 전부 내향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닮고자 노력을 아무리 하여도 한계가 있었고, 항상 갑갑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지금 개인적으로 드는 느낌은, 그들은 내향성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고, 나는 외향성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같아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나만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시기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런 시기에 이 책을 접하면서 나의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20세기에 들어 성격의 시대, 개성의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주체사상이,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 도래가 절묘하게 결합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양사회의 공동체는 주체위에 성립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인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인권이 자본주의와 결합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노동력은 상품을 생산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해낼 수 있는 이들이 각광받게 되었고,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이 중요시되면서 자연스럽게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생존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매력인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중이고, 셀프 브랜딩이라고 하며 자기PR을 적극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만 알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인가? 본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인정이라는 것을 내가 먼저 나서서 ‘나 좀 인정해주세요~’ 라고 해서 인정받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정받을만한 수준과 실력을 갖춘다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 사람 아닌가?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분명히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확연한 강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방형 혁신 등을 주장하면서 집단지성이 필연적으로 개인의 지성을 앞지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처럼, 왜 우리는 끊임없이 외향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외향적 사고마저 요구받는 것일까? 과연 외향적사고가 반 고흐를, 뉴턴을, 간디를, 스티브 워즈니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진 않다.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결론은 결국 사람이 소비재로 전락하면서 나타난 아주 깊은 폐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비재가 아니다. 재화가 아니다. 그냥 존재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도 위대한 또 하나의 존재이다. 그런 우리가 함께 만나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훈련시키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참 어려워진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자신을 성격의 시대에 맞춰 억지로 외향적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 숲속으로 들어가서 오두막집 하나짓고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넓혀지고 있으며, 함께 잘 살기 위한 다양한 생각들이 모색되고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인. 고독은 창의성의 필연적인 원료가 되듯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는 조금의 버팀이 필요할 것 같다. 나의 고독의 힘을 믿고, 나를 믿으며.

 

 

“순수하게 내성적이거나, 순수하게 외향적인 것은 없다” - 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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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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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이동도, 공간의 이동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 읽으면서 분명 나중에 반전이 있을 거야, 고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시킬 거야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점점 줄어드는 책장수와 함께 그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솔직하게 왜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서사를 가지고 있었어야 했고, 기승전결을 통한 마무리를 가졌어야 했던 작품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을 시도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베케트도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와의 인터뷰에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 이라고 얘기했듯이, 고도라는 존재는 알 수 없다. 교도소에서 연출되었을 때는 신이다, 빵이다, 희망이라고 수감자들은 얘기했다고 한다. 

  

이들은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지, 직접 찾으러 가던지, 다른 방법을 찾던지 등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하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렇게 이 삶의 허무함을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 생각하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 삶을 살아가다보면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고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고 우리 앞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만이 있을 테니 아등바등 열심히 살 필요 없다. ‘그냥 사는 대로 살아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순간만을 즐기면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에게 희망을 주고 해방을 시켜줄 것이라 믿는 잘 알지도, 알 수도 없는 고도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존재의 부조리함, 역사의 무질서함, 인류의 무능함을 이 극의 전개방식과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연극으로 아주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힘을 가지지 못한 이 극본이 왜 연출되었을 때 큰 호평을 받았을 까라는 부분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힘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라는 형식마저도 파괴해버리는 현대 해체주의의 모습을 보게 되며,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에 집중하게 되며, 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곤 좋은 작품이었다고 호평하며 알린다. 개그콘서트와 같은 현대 스탠딩 코미디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심형래, 김형곤의 「유머일번지」와는 다르다. 요즘의 「개그콘서트」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90년대의 애절한 가사가 일품이었던 발라드와는 다르다. 반복된 리듬과 가사, 포인트 안무로 우리를 사로잡는 아이돌의 후크송 음악과 비슷하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순 없지만, 나에겐 채워진 그 무엇인가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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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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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배경도 역할을 하였겠지만 동양의 삶에서는 나의 일이 곧 삶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 자신의 삶을 세우는 일이었고, 그 일 속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서구근대문명이 들어오고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일이라는 것이 내 삶과 분리 된,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린 사고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보니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Work Life Balance라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부분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삶에 대한 태도와 일에 대한 태도의 일치라는 부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동양적인, 참으로 동양적인 사고인 것이고, 그런 사고가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일환으로서의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기계발서라는 부분에서 2,3년 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참으로 다르게 다가온다. 그 당시에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 해보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실천서로서 존재했다면,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읽는 자기계발서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많은 부분들이 나의 경험과 오버랩 되어서 재해석되기 시작하며, 그 부분들에 큰 공감을 하면서 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계발서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삶을 살아가다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도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강연을 들으러 갔었고, 그 당시 들었던 한마디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장들은 웅성웅성 거렸지만,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적용했던 이나모리 가즈오. 즉, 수려한 문장력을 가진 말이 아니더라도, 짧고 간결하게 한 문장이 가지고 있는 깊은 속뜻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자기성찰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경지다. 왜냐? 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 끝에 달하여 얻는 메시지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지만, 진리라는 그 어떤 것들 안에서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삶. 이 책속의 이야기만 본다면, 직원들과 동료들과 합의되지 않은 많은 결정들을 스스로 하고, 그 결정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고 한가지의 신념으로 만들어 해내는 능력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희생되고 착취당한 개인은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부산물 같은 것이라면 우린 이 부분을 철저히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이나모리 가즈오의 선택과 행동은 무엇이었을지 책을 읽으면서 많은 궁금증이 들었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고, 그 일을 헤쳐나감에 있어 과정에서의 이해보다는 결과를 통한 납득을 시켰던 경우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나모리 가즈오의 생각을 알고 싶다. 이 부분은 정말 딜레마인 것 같다.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것에 사활이 걸린 것이라면 과정 모두가 무의미해져버린다. 아직도 끊임없는 물음과 경험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야 할 물음이다. 지금까지는 결과를 통한 납득에 더욱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경영자라기보다는 참 인간의 삶을 살았던 이나모리 가즈오의 삶. 처음엔 뭐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했지만, 역시 구루라 불리는 이들의 글 속에서는 화려한 문체가 아닌 담백한 표현으로 녹여내는 삶의 내공은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는 정말 질 좋은 영양소가 됨이 틀림없다.

 

즉, 책은 편식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아직까지 나의 수준에서는 책의 수준을 평가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참아내고, 조금 더 녹여내고, 조금 더 숙성시킬 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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