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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의 역사
클로딘느 사게르 지음, 김미진 옮김 / 호밀밭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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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모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다보니 ‘외모‘에 대한 평가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창조된 무엇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분명히 극복 할 수 있다. 외모를 넘어선 정신을 중요시 하는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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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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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과 안토니오 그람시의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를 같은 시기에 읽게 되었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글이 가진 논리 자체의 힘 보다는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힘에 상대적으로 매력을 많이 느꼈다. 상대적으로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는 저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기도 했지만 글이 가진 매력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보니 전자는 세계적인 문제지만 나 자신의 문제라고는 인식하기 어려운 난민문제와 테러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후자는 파시즘 정권 하에서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겪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는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런 시대적 배경이 상대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시대적 배경이 공감 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분위기를 생각해본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 책 속에서 소개한 철학자 크로체의 말처럼 역사가 갖고 있는 동시대성을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성은 우리의 삶에 다양한 가르침을 준다. 따라서 역사는 숙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현대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무장으로 전쟁에 대한 위험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유신정권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박근혜 정부의 행동들은 국민들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세계적 추세의 경제위기는 많은 이들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으로 빠트리고 있다. 100년 전 세계대전 속 이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서술해놓은 에세이들은 다시 한 번 재조명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사회에 공포를 조성하는 자들이 있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세력들이 존재해왔다. 어쩌면 이런 이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역사는 끊임없이 쓰여 왔으며,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지젝은 다양한 문제가 곧 나 자신의 문제임을 깨달으라는 이타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이기심의 문제인식을 요구합니다. 그람시는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도 바닷속으로 가라앉지도 않고 노래를 들으면서도 유유히 통과할 수 있는, 스스로를 견고하게 방어하고자 하는 율리시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석학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조직적 움직임 이전에 개인의 각성을 중요하게 바라봅니다. 혈기왕성하던 20대 시절 이런 결론을 마주하면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는 간디의 좌우명처럼 그렇게 되길 꿈꿨습니다. 그러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면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30대가 되자, 삶의 현실이라는 무게를 버티고 이겨내기조차 버거운 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의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는 좌절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꾸준히 읽는 이유는 몰라서 겪게 될 억울함이 더욱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며, 아직은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는 행동을 미약하지만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개인의 힘을 믿고싶은 이라면 그람시의 글을 일독하시길 권유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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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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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단어 테러’, ‘난민’. 우린 더 이상 이 두 단어에 감정의 변화를 크게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난민들은 아프리카와 중서부 아시아에서 발생하며, 그들은 유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테러 역시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이 모든 문제의 기본 바탕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결과로 발생한 계급투쟁으로 바라봅니다.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뜬금없는 계급투쟁이라니 동의 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젝의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진정 아프리카인을 돕고 난민 발생을 막고자 한다면 바로 자본주의의 개입부터 비판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 ,,, )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권력의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실제로 난민 수송을 통해 돈을 버는 조직이 생겼으며 엄청난 규모의 지하경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처지는 딱하지만 난민 행렬이 교모하게 기획된 프로젝트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일 뿐이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작동방식은 노예양산일 뿐입니다. 그 모습은 우리 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급 6,030원에 자신의 열정을 바치고, 가방 안에 컵라면 한 개를 남겨놓고 삶을 마감한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역시 언제든 그런 삶 속으로 뛰어 들 수 있다는 불안감은 우릴 옥죄어 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가지 반응을 취합니다. 바로 외면입니다. TV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난민들의 모습,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의 모습, IS로부터 테러를 받은 바그다드의 참상 등을 우리는 또 하나의 '타인'의 모습으로 '관찰'하며, 또 하나의 이미지로 '경험'할 뿐입니다. 나의 생각과 사고의 틀을 국가적인 분할에 가둬버립니다.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타인의 고통'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바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으며, 이것을 멈추기란 공멸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니까요. 이런 문제를 지젝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얘기했을까요?

 

난민을 도우려는 자세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동정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돕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 제발 일체의 감상일랑 떨쳐버리자. 그 감상은 대다수 난민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진다. 난민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중략)

 

두 팔을 활짝 펴고 맞아주며, 공감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함이라는 최선(우리의 눈에 최선)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관대함의 과시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안겨준다는 단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의심을 품어야 한다. 과시는 정작 요구되는 것을 애써 잊으려는 꼼수가 아닐까?”

 

이타적 덕성의 과시는 궁극적으로 이 목표의 실현을 방해한다며, 그들의 문제가 곧 나 자신의 문제임을 깨달으라는 이타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이기심의 문제인식을 요구합니다. 사실 이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좌파 지식인들이 항상 우리에게 선언적으로 내뱉는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은 우리가 이 과제를 수행할 운명적(역사적 필연성)인물임을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명확한 방법론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거기서 오는 답답함은 책을 읽은 후 남게 되는 찌꺼기입니다. 그리고 사실 방법을 제시했다면 오히려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려서 현실감이 더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어떻게 문제인가를 인식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테니까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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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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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 써야합니다>

 

리베카 솔닛분명 제가 들어본 이름이었습니다. 낯설지 않은 이름을 검색을 해보았고, 1월에 읽었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맨스플레인)의 저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접했던 작가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레 선입견을 가져옵니다. ‘이 책 역시 페미니즘 성향의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있겠지.’라는 예상과 함께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제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으며,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진 않았지만 전작을 발표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녀의 어머니라는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중략)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그녀가 긴 페이지에 풀어놓은 이야기의 흐름은 위 문장과 동일합니다.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자신에게 발생한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체 게바라의 혁명 이야기, 아이슬란드 늑대 이야기, 에스키모 여인 이야기, 프랑켄슈타인과 눈의 여왕 이야기를 넘나들며 밖으로, 경계 너머로 헤엄쳐나갑니다. 어머니의 병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이런 이야기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로부터 그녀를 끄집어냈던 광활함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과도 화해하게 됩니다. 글을 썼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글과 함께 그녀는 온전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그녀의 생각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며 깊숙한 고독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이를 극복하고 다시 그녀 자신을 되찾는 모습에선 진한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읽은 전경린 작가의 단편소설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을 보면 이쁘지도 않고, 지적이지도 않은 학교 앞 문방구나 운영하며 밤엔 동전계산하다 잠이 드는 엄마처럼 살기 싫어하는 11살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몇 가지 사건을 통해서 주인공은 조금씩 성장을 합니다. 엄마에게 왜 자꾸만 아이를 낳느냐고 묻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아기를 좋아하니까, 그래도 아기가 걸을 때까지는 집에 좀 붙어 있어주니까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인공은 엄마에 대한 가시가 휑하니 빠져나간 것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엄마는 또 딸을 낳게 되자 울면서 집안에 모셔둔 삼신상을 두드려 부수고, 주인공은 엄마와 자신이 고통이나 슬픔이나 두려움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한 몸이라고 느낍니다.

 

작품의 모티브와 결말이 맞닿아 있어서 그럴까요? 멀고도 가까운은 분명 에세이지만 제겐 잘 쓰여진 성장소설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장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질문하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 삶은 성장을 멈춘 삶이며, 늙어버린 삶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린 그녀의 멋진 성장드라마 한 편을 함께 읽고 있는 것이며, 내 삶 속에서 멈춰버린 성장을 다시 일깨울 수 있게 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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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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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품을 읽고 나면 마치 개안수술을 받은 것과 같아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 버지니아 울프 -

 

2년 전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많이 반대하는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급류에 휩쓸리듯 흘러갔습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요목조목 따져가며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생활은 시작되었고, 많은 부분들을 직접 당면하게 되면서 함께 생각하고 의견을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3개월 전 아이가 태어났고, 육아와 씨름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아이와 함께 하는 세가족의 삶에 익숙해질때쯤 이 책을 만나게 되었고, 운명과 같은 만남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결혼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부계혈통에 대한 인식은 여성의 정절을 보증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성의 종속을 낳았고,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기독교에 의해 결혼은 간음의 죄를 예방하기 위해 존재했으며, 성적 미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필연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강등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부계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종속적이었고, 이런 인식으로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유지되었던 결혼에 프랑스혁명 이후 낭만적인 사랑의 결실과 같은 관념이 들어섰습니다. 결혼과 부부라는 관계 하에서는 언제나 남성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 상호 대등한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사회적 변화

그 이후 1928,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 선언했고, 이 책 역시 딱 1년 뒤인 1929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여성들에 대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한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약 90년이 지난 지금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면 많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자식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습니다. 간통죄 역시 사라졌으며, 이혼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점차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젠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까지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으며,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삶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여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경제활동에 제약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인식과 행동의 변화는 제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 합니다. 러셀이 바뀌어야 한다며 설명하는 그 시대의 잘 못된 성에 대한 인식은 제가 살아온 사회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쉬쉬해야 하는 것이며, 드러내고 밝히는 것은 저속한 행동이니까요. 비록 케이블 방송이긴 하지만 <마녀사냥>과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시도가 시작된 것은 큰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이 역시도 대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결혼과 성윤리가 필요하다.

출세를 위해서 사랑을 고스란히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기만 할 뿐 결코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돈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오늘날의 세계에는 사랑의 충분한 발전을 가로막는 심리적인 장해물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자신의 개성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는 어리석으면서도 상당히 현대적인 공포이다.”

 

인류는 단 한 번도 경험한적 없는 양성평등 사회를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모색을 해야 합니다. 러셀은 진정한 사랑이 앞으로의 결혼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답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현 시대에 비춰 보았을 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동의할 것입니다. 많은 사회문제 발생의 원인에는 사랑의 부족이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러셀이 주장하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지침으로 삼아 공론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아내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다.

결혼의 진정한 목적이 자녀출산에 있다는 이야기는 짐짓 받아들이기 어려우면서도 결론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동물적인 행위에서 이뤄진 제도이기에, 이 안에서 인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왜 아내와 함께 하고 있는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됩니다. 특히 자녀의 양육에 있어서 많은 부분들이 국가에 이양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연스레 부모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이양이 많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로서 존재하는 나는 무엇으로 존재해야 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아직까지 답은 내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자식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출발점에서 만난 이 책이 다양한 해법들을 제게 던져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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