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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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 끊임없는 무수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수 많은 사건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판단과 선택을 하게되고, 자신이 앞으로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라는 것에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준이 있다면 그 순간 자신을 평가하고 남과 비교하는데 얼마나 용이할까? 그런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너는 나보다 부족하다. 그런 잣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철학적, 미적 기준들을 만들어나갔던 것일까? 하지만 이 기준이라는 것에 절대기준은 존재할 수 도 없을뿐더러, 존재해서도 안되는 것이기에 우린 끊임없이 상대적 기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성장하기도 좌절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평생동안 불안감에 휩쌓여 살아가게 되어있다. 정녕 이 불안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인가? 그렇다면 이 불안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면?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면?

  

또 다시 부활했다. 4대악, 악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에는 한단계 더 나아간 의미가 있다. 그들이 선이라고 믿는, 절대 선이라고 믿는 개념들을 규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들의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지지 못할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이유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특정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들이 정의한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런이들이 삶을 당면함에 있어서 느끼는 불안, 이것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 그런 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길 속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자, 그렇다면 우린 성공이라는 개념을 다시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정해놓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을 나 자신에게 정말 진지하게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강요된, 주어진 개념에 의해서 희생되고 있는 반대개념 속, 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왜 살아야만 하는지도 모른채 우리는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우린,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영역안에서 나의 특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도덕성이 훼손당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시도된 부와 선의 연결, 고가의 제품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고, 더욱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명예로운 사람이며, 희소성이 있는 제품은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런 삶을, 모습을, 물자체를 소유하고 영위하게 되는 것에다가 행복을 연결시키기 까지 한다. 즉, 우린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어쩔 수없이 주어진 사회구조는 자본주의다. 소유의 개념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우리 삶은 감탄 할 것이 많이 있고, 아낄 것이 많이 있고, 나눌 것이 많이 있으며, 사랑할 것이 많이 있다. 사회구조가 나에게 강요해버린 그 구조속에서 당연하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기에는, 우리 개인의 역량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 즉, 소유로부터 오는 불안으로부터의 회피만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넣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모색하고, 이유를 찾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 그 속에서 소유도 존재할 수도 쾌락도 존재할 수도 절망도 존재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을 행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삶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그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행복의 출발일 것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고 속박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어떤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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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산문선 우리고전 다시읽기 45
구인환 엮음 / 신원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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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그래서 그냥 씹어 삼켜 버리려고 했다. 우걱우걱. 하지만 그 마저도 실패했다. 씹어 삼켜 버리는데 필요한 내공조차도 부족했다. 그랬다. 이 글을 써내려간 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약용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어렵게 다가왔을까? 왜 그렇게 책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을까?

 
그 이유로는 첫째. 18세기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한국사에 대한 공부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기에, 이과를 선택하면서 역사는 선택조차 하지 않았기에,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이름을 들을때 ‘아 맞다!’라고 떠오르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쉬이 읽기만 한다면, 그저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은 글자들의 집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이런 고전을 읽을때 제대로 읽기 위한 그 첫 번째가, 그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선 그런 생각과 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고, 그 내용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던 다양한 어려움들을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서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을까?

 
둘째. 아주 높은 수준의 논리적 기술서였다. 아들에게나, 이인영에게나,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글. 어떤 형식의 글을 쓰더라도 논리 구조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 상대방의 상황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에 대한 비판, 그냥 비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명확한 대안 제시, 이를 통해서 얻게 될 에상 도출 결과까지. 4단 구성이라는 형식적으로 완성 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생각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다양한 지식인들의 글을 통해서 배운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완전한 논리 흐름으로 인하여 나는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당연한 말을 늘어만 놓고 있지? 라는 역설적인 이해에 빠지기도 했다. 그 만큼 정약용의 생각이 이해에 밝고 민주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뒤의 내용을 현 시대로 끌고 들어온다면, 아이디어 공모전의 기획서라고나 할까? 상금 꽤나 많이 벌었을 것이다.

 
셋째. 책 구성자체에서 오는 어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이것도 다산 정약용의 박식함 때문일까? 너무나 다루고 있는 분야가 다양하다. 정치부터, 기술, 사회제도, 다양한 이념들의 근본에 대해서 우리 삶 전체를 다루고 있다. 이는 그의 500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18년간의 유배지 생활마저도 자신에게 학습을 하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방대한 지식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그의 삶. 일상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이었기에 그의 삶이 묻어나 있는 글을 통해서 괴리감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정약용이 바라보고 질책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다양한 정치 및 사회제도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정치며,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며, 인류는 언제나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쩜 이렇게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런 만큼 정약용의 생각을 지금의 시대에 맞게 옮겨 표현한다면 우리 삶에 많은 개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온전히 세운다는 것은 참 어려우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목표로 해야 하는 업이라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정약용의 삶은 정말로 깊이 존경할 만하며, 지식의 잣대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널리 이롭게 쓰고 하는 부분에서 내가 살아가고 하는 삶의 모습에 많은 귀감이 된다.

  

“시(詩)라는 것도 끊임없는 학습의 기초가 완료 된 후에야, 비로소 안개 낀 아침과 달 발은 밤, 짙은 녹음과 보슬비 내리는 것을 보면 그 서려 있던 감흥이 격동하며 표연한 시상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음조와 선율이 유창하게 우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 세계의 생동한 경지이다. 나의 이 말을 실제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렇게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한 번 자기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을 터뜨려 놓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일러 ‘문장(文章)이라 한다. 이런 것이 참으로 문장이다.”

 
나는 정약용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삶 속에서 흔히 쓰던 그 한문장의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시작점을 찾은 것 같다. ‘지식을 토해낸다.’ 도저히 도저히 그 속에 담아둘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토해낼 수 밖에 없었던 그 경지. 학습하기를 멈추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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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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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일본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60년대. 그 시절에 폭풍같이 등장하여 ‘감수성 혁명’을 불러일으킨 김승옥의 소설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에게 소외된 자기내면의 아름다움을 표출해낼 수 있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우리 감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많은 이들이 문학계로 뛰어들면서 한국적 문학의 시류를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서울대 문리대는 대한민국의 현대 문학사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무위자연의 공간,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화폭에 풀어놓을 때, 그 매력의 화룡점정 역할을 하던 것은 언제나 소나무와, 학과, 안개였다. 나에게 안개는 무릉도원 속의 이미지로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하지만 작가 김승옥은 안개를 무진이라는 공간에 덧씌움으로서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살려 놓는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 ‘무진’과 그 무진을 ‘여귀가 찾아와서 내뿜어 내놓은 입김처럼 뒤 덮고 있는 안개’를 만들어 내었고, 이 안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에 표현되는 참으로 일본적인 ‘설경’과 비교되어, 참으로 한국적인 ‘안개’를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이 안개는 1980년대 기형도의 <안개>로 이어졌고, 2000년대 공지영의 <도가니>를 통해서 무진이라는 공간과 함께 다시금 안개가 살아나기에 이른다. 이렇듯 한 작가가 연상해 낸 이미지가 50년이 넘는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한국인들의 얼굴에는 깊게 드리운 안개가 누구에게서나 보이게 마련이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의 출밤점에 선 한국사회의 모습, 그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주의가 잠식하기 시작하는 물질주의,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개인. 속세를 벗어나서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내고 싶지만, 결국은 사회속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숨긴 채 살아내며, 내면이 아닌 표피로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이 작품에서는 표현해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인공의 ‘무진’과 같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싶을 때 찾아가는 그러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여기서 주인공은 그렇다고 해서 그 과거의 모습을 딱히 바꾸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모습을 현실로 가져오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용으로만 간직한 채 묻어두고만 있다.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편지에 많이 썼듯이, 지금도 쓸쓸하게 존재하고 있을 과거의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자신이 쏟아 낸 단어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느낀 소외감으로, 그 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그렇게 찾아온 것일까?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안개’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 안개속 공간을 찾아간 주인공에겐 사랑도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기쁨도, 그 어떤 감정과 기분도 한 가지가 강조되거나 강요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감정으로 희미하게 존재하고만 있다.

  

이번에 접한 단편 모음집은, 단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복선이나 상황에 대한 암시와 같은 기법들이 많이 배제된 채 자신의 시선이 옮겨가는 곳으로, 자신의 생각이 옮겨가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격이라 쉬이 읽히지만, 여러 페이지를 다시 되돌아가서 읽고, 또 읽게 만드는 ‘도돌이표’가 여러 군데 찍혀 있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작가 특유의 문체도 한 역할을 하였다. 최인훈 작가의 문체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자신의 시선을 풀어낸다.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멋스럽게 표현하려 노력한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서양문학을 접할 때는 무언가 자신의 내면과 싸워가는 그런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다면, 한국 작가들의 글을 접할 때는 번역본에서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작가들만의 문체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하지만 이런 문체를 어떻게 감정이 없는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점점 더 한국작가들의 관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무진기행보다 <서울 1964 겨울> 작품이 훨씬 깊게 다가왔지만,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학적 표현의 혁명을 이끌어 낸 그러한 기념비적인 성격과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무진이라는 미지의 공간과, 그런 공간을 더욱 살려낸 ‘안개’라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김승옥을 대표하는 작품이 <무진기행>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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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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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장이 한국문학이 포함된 추천 도서에서는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있고, 여러 카피라이터 및 철학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꼭 한 번씩은 언급하고야 마는 글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에게 최인훈의 「광장」은 수능 공부할 때 자주 나오던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아! 이게 그 소설이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던 건 비단 나뿐일 것인가?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유토피아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풀어내었다는 광장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고 그 마지막은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으로 빠지고 만 한 나약한 개인이 되어버린 것 만 같다. 광장을 꿈꿨지만 남한이라는 사회는 개인의 부도덕한 욕심만이 가득한 ‘밀실’로만 채워져 있었고, 푸른 광장을 찾아 월북하지만 그곳에서는 집단의 이념만을 존재하는 ‘잿빛광장’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비단 그때만의 문제일 것인가? 지금의 우리 사회는 더욱 더 단단해져버린 밀실로 꽉꽉 채워지고 있으며, 그 밀실의 증가속도는 작가가 고민했던 때보다 더욱 빨라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 지 못한다. 정치적 이념으로 볼 수 있는 광장과 개인의 자유와 욕구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밀실은 언제나 상호보완적임과 동시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러나 밀실과 광장은 결코 하나의 공간이 될 수가 없다. 자유를 보장하면 평등이 깨어지고, 평등을 전제하면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점점 더 밀실만을 생산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라면, 그리고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면 더 깨끗한 밀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고, 그 밀실들이 모여서 지금보다는 더 나은 광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새로운 광장을 만들고, 그 광장에 밀실을 만들어 넣는다는 실패로 판명이 낫기 때문이다. 광장을 추구했던 구소련의 붕괴도 그렇고, 밀실을 추구했던 미국의 극심한 양극화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떠나, 시대적 상황을 떠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높은 정신적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 3국인 중립국을 향해 가던 명준 에게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몸을 맡기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남한에서 북한에서 두 가지 체제를 직접 몸소 겪고, 그 곳에서 발전가능성을 본 것이 아니라 실패의 참혹함만을 맛보았던 그였기 때문에, 중립국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국 그런 경험 끝에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소리칠 수 있는 광장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의 밀실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는 한 사람, 즉 인간 자체만이 광장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가 꿈꿨던 푸른 광장과 같은 드넓은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피붙이를 안고 저 멀리 떠난 은혜와 딸을 생각하며 뛰어든다면, 그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광장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가 다뤘던 사회 현실과 문학사적 의의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 현실을 공감할 만한 사회 환경적 조건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저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펜촉을 부러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가의 문장력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속에서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최인훈의 글귀는 한자 한자 꼭꼭 씹어서 소화를 최대한 시켜서 삼켜도 아직은 넘쳐흐르고도 넘쳐흐른다. 속독을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 문장들이다. 한 문장도 놓치기가 너무나 아깝다. 그는 "삶 들여다보기"의 진정한 고수다.

 

마지막으로, 서양문학의 번역본이 아닌, 이런 높은 수준의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의 원본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음이 가장 값지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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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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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수용소 문학의 정점, 헤르타 뮐러 「숨그네」

“소설 창작에서는 사건 중심인 추리 소설을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플롯이 이끄는 소설과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中

 

이 작품은 망명한 시인이자 실제 수용소 생존자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슬을 토대로 헤르타 뮐러가 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증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2차 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 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충격적이고 강렬한 시적 언어로 밀도 있고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개인적 선호를 따지자면 사건의 전개 속에서 주인공이 심적 갈등을 겪고, 이를 통한 내적 성장을 보여주는 ‘캐릭터 중심’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숨그네>는 제가 좋아하는 성향의 작품은 아닙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써졌지만, 반 이상을 그와 함께 생활하는 수용소 내부의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자 시점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소재는 풍부하며, 다양하게 발견되는 현실 순응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무기력함은 한층 더 깊게 전해집니다.

 

2. 간접체험만으로도 느껴지는 수용소 생활의 잔혹함

그녀는 우리에게 수용소라는 곳의 잔혹함을 이렇게 전합니다.

 

“뼈와 가죽 배설되지 못한 수분이 삼위일체가 되어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사라졌고 성(性)은 퇴화했다. 그 혹은 그녀라는 말은 썼지만 저 빗이라든가 그 막사라고 할 때의 지시어와 다를 바 없었다.”

 

성이 사라진 채 욕구만 남아 있는 곳, 배고픔 앞에선 먹을 것이 그들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며,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태연하게 대처할 뿐인 공간입니다. “삽질 1회 = 빵 1그램”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무게 또한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주인공 레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의 무게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인해서 더욱 무겁게 전해집니다.

 

예전에 읽었던 마르틴 그레이의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한 역경과 고난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에 개인적 선호로는 상대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숨그네」속에서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오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한층 더 깊은 시름과 절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수의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웅적 탈출기가 아닌, 다수가 보여줬던 치욕적인 현실 적응의 모습을 통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수용소라는 공간적 특징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3. 조어(造語), 그녀만의 작품색을 견고히 만들다.

‘숨그네’, ‘볼빵’, ‘하조베’, ‘배고픈 천사’ 등 그녀는 작품 속에서 독특한 조어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력은 루마니아어와 독일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작가의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다양한 조어 중에서도 가장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말은 제목이기도 한 ‘숨그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에 있어 이 단어는 ‘배고픈 천사’라는 말 보다 오히려 비중이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가져볼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수용소 안에서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합니다. 배고픔, 추위, 극심한 노동 속에서 나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매 순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계인의 삶이라는 상황을 작가는 ‘숨그네’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4. 수용소마저 그리워하게 되는 한 사람의 인생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누구든 결정할 필요도, 결정할 의지도 없었다.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그 바람을 뒤로 밀어두었다. 감히 그리움을 앞세울 수 없었다. 기억이 이미 그리움이라고 믿었다. 머릿속에 항상 똑같은 장면이 돌아가고 세상과의 격리가 익숙해지면 그리운 것은 기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과 단절되었던 시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기 시작했으며, 가족 구성원들과의 삶마저 단절 시켜버렸습니다. 수용소의 경험이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은 아마 이런 순간이지 않을까합니다. 세상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지 못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 낸 수용소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말 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헤르타 뮐러 역시「숨그네」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은 산다. 단 한 번만 산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 지어져버린 개인들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과 현실 앞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것 자체가 큰 사치이고 결례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한번뿐인 내 삶의 중요성’입니다.

 

5.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 소설가 김애란

소설가 김애란은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서 이 작품을 읽고 이렇게 얘기 합니다.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 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살면서 우린 많은 일을 겪게 되겠지요?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테고요. 지저귀듯 노래하며 시를 읊을 시절도, 기도하듯 무릎 꿇고 말을 줍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숨그네』는 한 인간이 처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허기와 고통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거기서 사람이 만든 말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어떤 일을 돕고 있는지 목격하는 건 이제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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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책을 마주하고 목격한 것은 삶이라는 것에서 격리 당한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모습입니다. 극한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지만, 때로는 수용소 바깥의 세상보다 더욱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마저 보입니다. 생존의 경계에 있는 이들이기에 인간으로서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도리가 그들의 삶의 규칙이 되기 때문입니다.

 

책은 덮은 후 저에게 질문을 한 번 던져봅니다. 자유라는 것을 대가없이 누릴 만큼 너는 삶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지. 지금의 나의 모습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숨그네를 타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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