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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ㅣ 민음의 시 131
김소연 지음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소슬한 바람에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서랍장에서 긴팔 옷을 꺼내 세탁을 한다. 바람과 햇빛에 바짝 말린 옷에선 잘 구운 빵 냄새가 난다. 숲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쌉쌀하고 아릿한 늦여름의 열기를 맡는다. 지독하게 자신을 사랑했던 날들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자기 스스로가 빛이었으므로 주위는 어둠으로 캄캄했던 날들. 자주 넘어져 멍이 들고 물기 많은 바람에도 몸살이 났던 기억들. 생을 연료 삼아 스스로를 사각사각 갉아먹으며 시간이 흘렀다.
청춘의 시간은 상처나 흉터보다는 희미한 흔적으로 남는다. 하루의 시간은 담벼락에 늘어선 나무 그림자처럼 길어졌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머리속에선 괘종시계가 울린다. 강렬했던 시간들은 자잘한 일상으로 채워지고 열정 대신 안정감을, 기쁨 대신에 만족을 원하는 마음이 된다. 온갖 것들이 발광하듯 증식하고 부패하는 여름의 맛보다 헐렁한 가을이 편안해진다. 헐렁한 가을에 헐렁한 옷을 입고 헐렁한 얼굴로 숲을 걷는 맛은 늦가을 들판에서 깻단을 태우는 냄새처럼, 오래된 영화 음악을 듣는 것처럼, 아늑하고 허전하다.
청춘의 사랑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병에 가까웠다. 열정의 에너지는 소진되었지만 그 기억과 감각은 몸 어디쯤에 남아있다. 어둔 새벽 3시의 흐린 별빛을 보는 일이나 쏟아지는 산성 장대비에 몸을 내주는 일, 몇 날 며칠 술독에 빠져 헤매는 일, 그 절망적인 고독과 일탈의 검푸른 독성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여름과 가을 사이, 지나간 시간의 결을 더듬는 일은 나무의 잎맥을 더듬는 일처럼 까칠하고 아련하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빛의 모퉁이에서
십일월의 여자들
보기에 좋고 불편한 속옷은
벌써 오래전에 장롱 서랍 깊이 넣어두었다
그걸 다시 꺼내 입을 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집을 나서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해마다 여행 가방은 부풀어올랐다
떠날 수가 없었다
길게 늘어난 그림자도
나이가 들어 있었다
영락없이 얇고 흐릿했다
바람이 불면 미치도록 펄럭이다
식량을 담으면 봉긋하고 얌전해지는
구멍가게 비닐봉지와도 같았다
싸가지가 없다고 어린 딸을 때리던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어 있었고
딸에게 의지하여 딸이 된 엄마는 그러나
싸가지가 없을수록 눈물겨웠다
망치는 있고 못이 없었던 시절을 지나와서
이제는 온몸 모서리가 못 자국으로 헐어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서 배운 바대로
아내가 베를 짜는 밤을 엿보지 않는 남자와
일가를 이루기도 했다
어디든 간에
몸을 덮어두기 위해 입는 이 옷을
벗어 걸어두는 데가 모두 집이기를 바랐다
ㅡ 나를 안고 싶으니.
그럴 때 말고 바로 이럴 때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을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불귀 · 2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 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에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우욱, 이 거추장스런 육신 다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렸다지, 원앙금침 원앙금침, 마음의 방목 마음의 쇠락, 내버려진 흉가,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쑥부쟁이, 아카시아, 그 향기가 무모하게 범람해서, 나, 그 향기 안 맡고 마네, 너무 멀리 가지 말자는 말, 다 알 수 있는 곳에 있자는 말, 이해한다는, 사랑한다는, 잘 살자, 잘 살아보자, 그런 말에도 멍이 들던 사람, 두 사람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