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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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하는 나를 생각할 때마다 내 생각이 제대로 생각되고 있는지 생각하며 쓸쓸하다. 생각은 자신의 삶을 읽어나가는 능력이다. 능력이라 함은 타고난 재능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기다린다, 견딘다, 살아낸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자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사랑만이 시간을 견디게 해주고 그 안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까.

 

안현미는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열대어 몇 마리를 키웠었다. 작고 투명한 어항에 바닷가에서 주워온 작은 돌멩이들을 깔고 그 위에 구피를 풀어놓았다. 오 년을 새끼 낳고 살던 구피들이 하나 둘 죽고 어항도 금이 가버렸다. 이제는 돌멩이들만 남았다. 미끌거리는 돌멩이를 씻어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에 두었다.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자글거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돌을 들여다본다. 제각기 다른 무늬와 질감을 가진 돌들을 만지며 고요했다. 한낱 돌멩이 따위에서 위로를 받다니. 고요와 침묵은 쓸쓸하다. 평화를 준다.

 

애들이 어릴 적 강가에 가면 재빨리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떴다. 미끌거리고 울퉁불퉁한 돌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몸을 적당히 낮춰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히고 두 뺨은 발그레하게 상기된다. 던지던 동작을 풀지 않고 물살을 파고들다가 수면 위로 몇 차례 튀어 오르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아이. 돌이 바닥에 가라앉고서야 ‘엄마, 봤어? 봤어?’ 묻는 아이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지금 이 돌멩이도 아이가 조막손으로 모아 내 손에 쥐어 주던 것들이다. 돌멩이는 내 삶의 기억들이다. 작고 단단한 무생물 위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안현미의 시는 특별날 것이 없는 일상의 느낌과 생각들을 기록한다. 곤드레 밥을 먹으며 파를 다듬으며 상수리나무 아래서, 비정규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일상 어디에서도 시인은 삶을 사랑할 수 있다. 이별 후에,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삶이어도, 삶을 죽음만큼 아득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녀의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 비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은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래야 비루하고 단조롭고 실패한 것 같은 일상이 달라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희망을 아직까지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 날, 기적적으로 수리되는 것일 테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불혹, 블랙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 일만으로

나는 잠시 너를 사랑하는 것

 

 

     -  시집『사랑을 어느날 수리된다』에 수록된 「블혹, 블랙홀」 전문

 

사랑 꽃이, 꽃이, P지 않는 사랑.......공산당선언만큼

낡아버린 그 말......꽃도 시들면 쉰내가 난다던 말은

분리수거해서 사용할게요......그러니 누나......봄이나

기다리며 생을 낭비 하자던 약속 같은 건 종량제

쓰레기봉투에나 버려줘요.....

-이별수리센터 중에서

 

누군가 정성으로 아니 무심으로 가꿔놓은 파밭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파 한 단을 다듬는 동안

그동안만큼이라도 내 생의 햇빛이 남아 있다면

 

망우리 지나 딸기원 지나 누군가 무심으로 아니

정성으로 가꿔놓은 파밭 지나 구리 지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하얗게 하얗게 파꽃이 피는 동안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동안

-구리 중에서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줄 테지

-상수리나무 중에서

 

낯선 것투성이의 낯선 일상이 심지어는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건 아마도 38년을 사용해도 문득문득 타인처럼 낯선

‘나’라는 존재가 그냥 그저 그런 낯선 것투성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어떤 극미한 안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색깔로 치자면 모과향이 풍부한 희미한 노랑 같은.

 

매일매일 자전하고 공전하는 이 별의 낡은 테라스에 앉아

글렌 굴드를 듣는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

아무도 가보지 못한 검은 대륙과 흰 대륙. 자작나무의 영혼을 가진

당신과 함께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아무도 가보지 못한 이 별의 어떤 가능성.

-이 별의 재구성 중에서

 

뜻밖의 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울리는 알람이 있다고 믿는다 했다

꼭 사랑이 아니라도 울리는 알람이 있다는 말은 생략,

그건 좀 슬픈 이야기니까

 

뜻밖의 밤

 

우리는 사랑을 향해 동행할 수도 있었는데

늙은 저녁 서로의 외롭고 긴 외출을 기다려줄 수도 있었는데

가난한 내가 무작정의 우리로 확대될 수도 있었는데

대략 그 정도의 빚을 지고 싶었을 뿐인데

-축 생일 중에서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 앞에 가져와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배롱나무의 안쪽 중에서

 

 

노천까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봄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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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글이 차곡차곡 쌓였군요. 즐겨찾기를 하지 않았더니 잠시 깜빡 잊었습니다.
이 시를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봄밤... 봄밤.. 참 좋은 어감입니다.
문득 이런 시가 떠오릅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고은 시였나요.. ㅎㅎ.

내이름은초록 2014-08-0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현미의 무던함이 좋았습니다 시를 읽고 곤드레나물밥을 먹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