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아 문학과지성 시인선 454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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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너무 가깝다.

 

현재의 시공간과 내가 동시적으로 반응한다. 느끼고 생각하고 반응하는 나는 그 순간의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게 주어진 ‘현재’이고 모든 지각이 일어나는 ‘나’인데 붙잡을 수 없다. 현재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나는 떠내려가는 사실만을 인식할 뿐이다.

 

현재의 시간은 나의 기억 속에서 재현됨으로써 인식되는 사건이다. 인간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현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가 없다면 과거나 미래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렇다면 시간은 바로 나이고 나는 시간이다. 그 작동원리는 기억이고 잘 기억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김이듬은 그 순간을 포착해서 시를 쓴다. 방금 기차에서 내린 그는 열차 침대 아래 넣어둔 카메라를 두고 내렸음을 알아차린다. 인터넷 중고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이 카메라가 아니라 벽돌임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귀고리를 찾기 위해 7층부터 지하까지 뛰어다닌다. 또한 정갈한 수도승 같은 요가 선생이 진한 화장을 하고 짜증 난 표정으로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행동에 무섭게 집중한다. 무성하게 일어나는 잡생각들 속에서 삶이 지닌 속악한 속성과 연결 고리를 끄집어낸다. 그의 시는 일상성 속에 드러나는 삶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에 잘 읽힌다. 잘 읽힐 뿐만 아니라 인상적으로 남는다. 시인의 펄펄 살아있는 감각과 끝까지 끌고 나가는 힘, 삶을 끌어안는 모습은 생을 향한 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 뜨자마자

 

눈 뜨자마자 뛰어내렸어

급히 신발을 구겨 신고

배낭을 끌어안고

 

곧바로 떠나가는 기차 꽁무니를 물끄러미

아뿔사, 내 카메라 백

조심스레 열차 침대 아래 밀어 넣어둔

 

번쩍하고, 순식간에 터지는 이것은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선명해지는 이것은

아, 잃어버린 것들

 

아마도 내 안에는 먹통 플래시가 있어서

대상을 놓친 순간 펑, 작동하나 봐

 

눈 뜨자마자 뛰고 눈 뜨자마자 사진을 찍고 이를

갈기도 했지 눈 뜨자마자 밥숟가락 쥐고 전화를 받

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어 한 때는 눈 뜨자마자 입

맞추고 가슴을 비며대며 설명해줘요 내게, 사랑! 발

음하기도 했지만 성에 눈뜨는 게 사랑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

 

눈 뜨자마자 죽은 아기가 있었지

눈을 뜨는 바람에 나는 고유한 걸 잃어버린 것 같아

우물쭈물하는 사이

검표원이 나를 쏘아보고

사랑에 눈뜨기 전에 돈맛에 완전히 눈뜬 소녀처럼

나는 웃었지 어디든

어슴푸레한 개찰구를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현지 화폐로 바뀌는 것 같아

 

 

 

빈티지 소울

 

카메라 대신 벽돌입니다 상자를 여니 벽돌 반

장이 나왔어요 믿을 수 없지만 깨끗한 벽돌입니다

왜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아니라 벽돌인지 물어보려

고 해도 연락두절이네요

(중략)

 

희미하게 어둠이 퍼져갑니다 보통 저녁입니다 골

백번의 골백번 더 살아본 날입니다 어이없고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지만 똑 같은 사기 사건도 수십

만번째입니다. 사소한 사기가 삶이지요

(중략)

 

내 영혼은 중고품입니다 수거함에서 꺼낸 붉은 스

웨터처럼 팔꿈치가 닿고 닳은 영혼입니다 누군가가 미

처 봉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기억입니다 불현듯 바다

에서 솟아올랐거나 화산에서 흘러내린 먼지입니다

(중략)

 

당신이 왜 떠났는지 압니다 비애와 슬픔의 차이도

알고 저 모퉁이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왜 나한테 눈

을 흘기고 가는지도 압니다 똑같은 일을 수십만 번

겪었으니까요 벽돌이 내게 온 이 상황에 대해서도

분개할 만한 일종의 흥미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건망증에 미달하는 기억력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카메라를 받기도 전에 선입금했고

또다시 사람을 믿었습니다 다행히 내 기억은 내 영

혼은 약을 쳐야 기어 나오는 벌레 같아서 마치 없는

것처럼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것입니다

 

 

 

잡스러워도 괜찮아

 

요가원에 등록했다 인도에서 수련하고 온 선생은

정갈한 수도승 같은 인상이다 옴 샨티 낮고도 맑은

목소리가 좋다 눈을 감고 마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겐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자

차차 잡념을 버리게 될 거라며 웃는다 웃는 미간 사

이에서 밝은 빛이 퍼져가는 듯하다

 

며칠 후 지하철역에서 선생을 봤다 감색 요가복

대신 가죽점퍼에 청바지, 상투처럼 묶었던 머리칼을

풀어 내리고 있다 무언가에 짜증이 난 표정이다 그저

그렇다 평범하고 너무나 평범한 행인이다 화장이 진

해서인지 그 빛나던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더 좋아진다

 

명상 자세로 눈을 감는다

막대기를 내려놓는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을 때는

언제나 맛있고 옴 옴 옴

이 순간 훨씬 무성해지는 잡생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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