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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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지 않은 풍경(최영미)

 

어디론가 갈 곳이 있어

달리는 바퀴들이 부러웠다.

앞만 보고 질주하다

길모퉁이에서 부드럽게 꼬부라지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부러웠다.

 

비에 젖은 8차선 대로는 귀가하는 차들이 끊이지 않고

 

신호등을 읽었다면,

멈출 때를 알았다면,

나도 당신들의 행렬에 합류했을지도......

 

내게 들어왔던,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하얀 가로등 밑의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보석 같은 빛을 탁탁 튀기며

지루하지 않은 풍경을 만들고

 

번쩍이는 한 뼘의 추상화에 빠져

8월의 대한민국이 견딜 만한데

이렇게 살아서, 불의 계절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비 오는 밤을 젖지 않고

감상하는 방을 주신 신에 감사하며,

독한 연기를 뿜었던 입 안을 헹구고

내 밑에서 달리는 불빛들을 지웠다.

 

 

 

 

사막(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어떤 경우(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나이 들어 지나간 삶을 반추하며 현재의 삶에 감사하는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다. 하지만 어쩐지 불편하고 아쉽다. 내가 시인처럼 딱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인데도 그렇다. 최영미의 『도착하지 않은 삶』이나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은 깨달음이나 아포리즘적인 구절이 많은 시집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각자에게 절실한 삶의 깨달음이 생기는데 시인도 사람이니까 그런 시를 쓰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시에서 만큼은 다른 지점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시의 효용은 감각의 극대화에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을 일깨우고, 그 순간에 경험된 감각으로 새롭게 나를 느끼는 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장르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개인의 개성은 고착화되고 감각은 무뎌진다. 살면서 겪은 실패와 상처, 혹은 확신으로 사람은 딱딱해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꿈은 실현 가능한 것에 맞춰지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생각과 감각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통제 가능한 상황을 선호하게 되고 개인의 관습이 침해받는 것에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 개인의 보수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고 감질나고 서툴고 격렬한 감각을 시를 통해 읽는 것은 재미있다. 어쩌면 나는 의미보다는 재미를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내게 있어 시는 청춘의 장르이다. 푹 익은 묵은지나 담근 술이 아니라 샛노란 참외의 지린 맛이나 싸구려 포도주를 홀짝이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어렸을 때는 아는 것이 없고 연약한데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엄마와 아빠, 여름 분수, 쏟아지는 비, 짙은 초록의 숲을 처음 느꼈을 때의 기억은 강렬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이제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데에만 감각을 사용한다면 슬픈 일이다. 감각은 현재 진형행으로 작동되고 새로워질 때 아름답고 에너지가 넘친다.

 

이문재 시인의 다음 시들은 조금 허술해도 아름답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은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중에서

 

 

 

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른 손에 칼을 쥐고

부욱ㅡ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나.

 

                    - ‘별똥별 ’전문

 

 

너무 밝아서 성냥 불꽃이 잘 안 보여도 뭐 괜찮고

정오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들은

모두 제 그림자에 집중하고 있어서 다들 말끔하고

 

맑으면서도 맵싸하고 칼칼하면서도 그윽한 국물에다

식으면 조금 서글퍼지는 밀가루 내음이 어우러질 것인데

 

                                    -‘국수생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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