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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ㅣ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생각이 복잡한 날이면 서글픈 마음이 된다. 대체로 복잡한 생각이라는 게 누군가를 미워한다든가, 어떤 일을 피하고 싶어서 마음이 분주해지는 경우인데 더 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 된다. 그렇다고 생각이 멈춰지는 것도 아니다. 복잡해진다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현재의 에너지가 부족하면서 동시에 끊어내기도 힘든 상태이니 그렇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가 권태를 낳는다. 권태를 느끼는 마음은 빈 공간을 허용하지 못한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머물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그럴 때는 꿈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아마 시간이 유일한 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은 나의 의지가 달성해 낸 결과가 아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견딜 수 있는 무능일 것이다.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끔 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가끔은 제 정신?) 그럴 때 시가 읽혀진다.
좋은 시는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 닿는다. 나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고 쓸쓸함이나 정겨움이라는 감정이 그 안에 있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마음의 자리. 두고 온 것을 다시 찾을 수 없다 해도 가끔은 그 곳에 가게 된다.
도너츠
눈 내리는 날
한 가운데 텅 빈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스산한 바람만 불었다
비움으로 끝내는 남아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처음에는 몰랐다
중심은 사라지고
주변은 드러나는 풍습이 그만큼 낯설다
그렇다고, 마음이 갇히지도 않았고 열리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다 먹혔을 때만
둘이 서로에게 고요히 번진다
안과 밖에 서로에게 스민다
둘이 다투지 않는 고즈넉함이다
너와 내가 하나이듯이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
밤과 낮이 하나이듯이
마치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그대로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흩어진다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서울 지하철 2호선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되돌아온 곳은 이미 지났던 곳이다
기억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나는 떠났던 때의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낯설다
얼떨결에 두고 온 것이 있다면
다시 찾을 수 없다
헤어진 사람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다
(중략)
보이는 것은 원이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선이다
그럴수록 원을 만들고 있는 연결고리의 이음새는 든든하다
입으로 꼬리를 물었지만 먹을 수 없다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으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끝내는 입도 없고, 꼬리도 없는 셈이다
날마다 일탈을 꿈꾸면서도
일탈이 곧 해탈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돌고, 돈다
미안하지만 해탈은 없다
우리는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잘 견딘다는 것은 마음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고 그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어떤 일을 피하고 싶어 생각이 많고 마음이 분주한 날, 태풍의 중심처럼 고요해진 마음의 빈자리를 떠올리며 시를 읽는다. 도너츠 혹은 지하철 순환선, 그 상징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