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ra Pausini
워너뮤직(WEA)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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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이 한 가수가 아직도 여고생 가수일 때 내놓은 데뷔 앨범인데도 해치워낸 일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라우라는 앨범 하나 낼 때마다 꼭 스페인어판도 찍어내곤 하는 것이 유별난데, 중남미에 그녀의 추종자들이 대량으로 나온 까닭이다.

그런데 그 동기도 바로 “La Solitudine”와 본 앨범이다.

자연히 다양한 언어의 번안곡들을 탄생시켰는데, 영어권에서는 헐리우드와 디즈니의 작사가로 유명한 영국의 팀 라이스가 “Loneliness”라는 제목으로 옮긴 바 있다.

“La Solitudine”는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에도 꼽혔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이든 잘 되게 일을 만들자면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한다는 것이 국제 대중음악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은 셈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의 추억어린 음악적 풍을 느껴보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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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Celine Dion - Avec Toi [2CD]
셀린 디온 (Celine Dion) 노래 / Union Square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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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영어가요가 지배한다.

셀린디온도 영어로 노래하는 가수로 한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셀린디온의 진수는 불어가요에 있고 불어로 노래할 때 셀린디온의 가창력과 음악세계가 제대로 살아나곤 해왔다.

미안한 얘기지만 영어 팝송의 세계란 노래인지, 아니면 기악곡에 노랫말을 붙인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점에서 셀린디온의 노래 중 정말 노래다운 노래는 오히려 불어앨범에 몰려있다.

이 앨범은 그런 불어앨범 중에서도 셀린디온이 미국시장에 데뷔하기 이전의 곡들이다.

셀린디온의 가창력이 이미 이 때 확립되었음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가창력이 불어 덕택에 제대로 발휘되면서 그녀의 노래가 지닌 진수가 제대로 살아난다.

셀린디온의 가창력은 흔히 벨기에의 라라 파비앙과 비교되곤 하는데 일반적으로 라라가 더 강렬하고 웅혼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 앨범에서 셀린디온이 들려주는 가창력이 라라 파비앙 못지 않다는 점에서 역시 셀린디온의 노래는 영어가 아닌 불어노래일 때 제 맛이다.

주의할 점은 유사한 앨범이 여러 종 더 나와 있는데 수록곡이 서로 다 겹친다는 점이다.

구매할 때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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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뵘 - 요한 스트라우스 : 박쥐 - 한글자막 포함
칼 뵘 감독, 요한 슈트라우스, 빈 필하모닉 (Wiener Philharmoniker) 연 / 유니버설뮤직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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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레타의 역사는 20세기에 들어와 고전 영화의 역사가 되었다.

토오키가 개발되어 드디어 영화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바로 영화로 각색된 오페레타였다.


오페레타가 곧 현대 대중음악의 직접 조상이라는 설명을 비너 블루트의 영상물을 리뷰하면서 한번 설명한 바 있으나 박쥐에 대한 설명,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서는 아얘 대중문화 전반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오늘날 국제 대중문화는 이른바 Mainstream이라고 불리는 주류 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주류산업을 지향하는 산업구조를 지녔다.

 

한류가 시끌시끌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국제 대중문화 산업구조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는데, 통상 라디오의 출현으로 매스 미디어와 만나므로서 거대 국제산업화되었다고 한국에서는 흔히 얘기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무리들이 주로 주워 듣거나 대중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서적 한번 읽어보지 않고 흔히 떠벌리는 소리다.

듣기에만 그럴싸한 설명으로서 장삿꾼이 자기가 파는 물건을 모르는 증거일 뿐이다.

 

이미 국제 대중문화의 주류 산업계 (Mainstream Industry system)는 19세기 후반부터 출현했고, 19세기 말에는 대중문화 전체를 거대 산업화로 이끌어어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청일 전쟁이 나기도 전에 벌써 국제적인 대중문화 흥행산업의 기본 구조를 갖췄고, 20세기 초엽에는 현재와 같은 형태의 국제 대중문화 흥행산업이 완비되었다.

 

다른 점은 오직 전기신호 기술과의 만남이 이뤄지기 전이었다는 차이 뿐이다.

전기신호를 활용한 음반의 보편화와 라디오 방송의 시작 등이 이뤄지기 직전이었으며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이제 겨우 등장하여 기존의 공연장들이 영화관 역할을 겸하는 정도가, 매스 미디어의 여명기였던 당시의 풍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활자매체를 통한 언론 기사로만 세인들에게 홍보하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장사 중 가장 비중이 큰 영업 형태가 공연 자체에만 전적으로 몰입하는 형태여야 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다.

그러나 이 차이라는 것을 잘 보면 활용하는 매체가 활자에서 전기신호로, 전기신호에서 데이타로, 다만 매체의 전파 수단만 바뀌었다는 사실 외에는 결국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지금도 차이없는 국제 대중문화 산업구조는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20세기 이후 영화 제작을 통해 현대 대중문화의 국제시장이란, 무슨 물건을 잘 팔아야 그 중에서도 주류 업계에서 부와 명성을 누리며 장사를 하고, 그런 물건을 장사하자면 무슨 재주로 그런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도 이 박쥐를 통해 확립된 것이다.

 

마침내 토오키가 보급되자마자 독일어권 만이 아니라 구미의 모든 영화 제작자들은 당장 팔아먹기 쉬운 영화는 바로 음악영화임을 거의 본능에 가깝게 직감했다.

이 후 독일어권 만이 아니라 그 때부터 영화 좀 만든다는 유럽 국가들은 당대에도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던 비엔나 오페레타들의 영상화 경쟁을 벌였고,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하다못해 유사품 영화라도 찍어내었으니 초창기 헐리우드 뮤지컬 영화는 그렇게 보드빌 영화로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2차 대전 이후 현재까지 세계 대중문화 산업에서 표준으로 통하는 것들이 나왔다.

 

우선 비엔나 오페레타의 영화화는 본격적인 현대 대중문화 산업 내에서도 주류 (Mainstream)가 되는 업계란 무엇을 사고 파는 업종인가 하는, 현재 상식적으로 한국 사회에도 알려진 표준을 제시했다.

 

화려한 관현악 사운드를 보다 잘 들려주자니 유서깊은 AV 업계의 브랜드들이 이 때 큰 혜택을 입었고, 영화 제작용 카메라 업체들이 이 때를 성장의 호기로 삼은 결과 ARRI 같은 회사는 현재도 전 세계의 영화 로케 현장에서 표준 장비로 군림하고 있다.

 

아울러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현대 코메디 영화, 헐리우드 뮤지컬의 모든 것들이 이 때 독자성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가, 다소 터무니없더라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헐리우드 영화와 뮤지컬, 컨템포러리 팝이라고 부르는 음악들, 극 중 캐릭터들의 설정 방법,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제작진들과 제작진들의 직함 등도 모두 오페레타 박쥐의 제작, 초연, 수정 및 재상연 등의 과정을 통해 보급되었다.

 

심지어 대중음악의 흥행 장사에서 금기사항도 오페레타 박쥐가 가르쳐 주었다고 해도 좋다.

너무 진지하거나 심각한 내용, 다소 간이라도 복잡한 줄거리 전개, 관객들이 따라 부르기는 너무 어렵다거나, 편곡해서 춤추는데 옮기기 적합치 않은 음악, 특정한 문화권이나 사회여야 제대로 알 정도로 너무 강한 정체성 따위는, 적어도 주류  대중문화에서는 뭘 만들어도 자제해야 할 일 내지는 달리 다듬는 절차를 거쳐야 할 것들로 통한다.

 

이렇게 세계 대중음악사상 지금도 지속되는 그림자를 드리운 오페레타 박쥐가, 또한 워낙에 메가히트작이기도 하다 보니, 상영관 전용 영화로, TV 방송용 영화로 무수히 만들어지더니 마침내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더 이상 벨칸토 창법도 쓰지 않는 연출판도 나왔고, 제임스 라스트와 폴 모리아, 만토바니 등의 팝 오케스트라 편곡판까지 나왔다.

단순히 극 중 일부 곡들의 발췌 편곡이 아니라 오페레타 박쥐의 전곡이 모두 편곡되어 무대에도 올랐던 것이다.

이 지경이다 보니 과거의 우수한 영상물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럼에도 유독 본 영상물을 강추하는 까닭은 현대적인 입체 음향과 영상 등을 즐길 수 있으면서 이 박쥐의 음악 만이 아니라 연출, 분장, 노래, 연기 등을 모두 조화시켜 캐릭터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보면 본 영상물은 오페레타 박쥐의 표준처럼 여겨도 좋을 정도여서다.

 

아이젠슈타인을 연기한 에버하르트 배흐터(Eberhard Wachter)는 전형적인 부유층 건달 노릇을 정확히 해석했다.

양반다우면서도 풍류와 여인을 쫓는 일에 관한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군상이기도 하고 적당히 속물이면서도, 세인들이 결코 미워하지 않을 법한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웃겨야 연기가 되는가에 대해 거의 표준을 제시했다.

 

로잘린데를 연기한 군둘라 야노비츠(Gundula Janowitz)는 영상 중 특히 헝가리 백작부인으로 위장하고 부르는 노래는 실로 표준이라고 할 만하다.

다른 많은 영상물과 공연 사례 중 노래만 해도 군둘라 야노비츠에 비해 가창력이 부족치 않으면, 대개 약간 노래가 굼떠 장단감과 그 때문에 살아나는 박진감을 키운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런데 동시에 하는 연기에서조차 군둘라처럼 아무리 헝가리 백작부인으로 위장해도 자신의 정체가 억척 주부임을 미처 숨기지 못하는 코믹 연기를 효과적으로 한 사례가 많지 않으며 지금은 더욱 없다.

당장 본 영상물에서 보여주는 군둘라아의 연기는 차라리 한국의 드라마에 억척 아줌마로 나와도 모자람이 없을 지경이다.

그런 연기의 절정은 바로 아델라 역을 맡은 레나타 홀름(Renata Holm)이 자칭 헝가리 백작부인의 정체를 모른 채 아이젠슈타인에게 "꼬리 잘못 쳤다가" 로잘린데에게 호되게 당할 뻔하는 대목과 노래하는 동안 내내 계속된다.

 

그 아델라 역을 맡은 레나타 홀름(Renata Holm)의 연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로잘린데에게 호되게 당한 직후 쩔쩔매는 연기는 한국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연기력이어서, 본 영상물을 보다보면 연기지도와 연출 등의 감독은 한국인이 하고 일부 배역들도 한국인 성악가 시켜도 오히려 비엔나에 역수출을 할만한 물건도 나오겠다 싶을 지경이다.

 

심지어 이 영상물은 오를로프스키 역까지도 남자인 볼프강 빈드가쎈(Wolfgang Windgassen)이 맡아 차별화시킴과 동시에 효과를 더 극대화시켰다.

통상 이 배역은 바지 역할이라고 하여, 여자 성악가가 남장하는 것이 관례인데, 놀랍게도 이 영상물에서는 그냥 남자도 아니고, 아얘 배나온 중노년으로 캐릭터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 결과 오히려 놀라운 효과가 나왔다.

약간 걸걸한 목소리로 연기하고 배 나온 중노년다운 오를로프스키 연기는 오페레타 박쥐는 일단 상류층을 웃음꺼리 삼는 재미가 있고나서 볼 물건임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켜준 것이다.


칼 뵘이야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칼 뵘은 역시 이런 대중음악과 친하기에는 다소 무겁고 진지한 지휘자라는 사실이다.

그의 모차르트도 다소 무거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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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요한 스트라우스 : 비엔나 기질
요한 스트라우스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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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에는 민속음악의 전통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음악들의 수 많은 장르들을 구성하고 있지만, 역시 전세계적으로 상업적인 시장을 장악하고 좌우하는 것은 Contemporary 음악이다.

이 컨템포러리 음악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세련된 코드들로 진행되는 화성법, 난이도가 꽤 높은 기악법을 통한 음향 효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곡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이르는 진행에 대한 구성의 다양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컨템포러리 가요들의 그 모든 것들이 시작된 뿌리가 한국에서는 미국 뮤지컬인줄 잘못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 중에서도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아닌 헐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인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짜 정답은 바로 비엔나 오페레타다.

 

20세기 초엽, 즉 우리 한국이 한일합방을 당할 당시만 해도 미국 뮤지컬이란 1970년대 한국의 방송가에서 인기높았던 버라이어티 쇼우 수준이었고, 비엔나 오페레타가 수입 상연될 때마다 생사의 기로에 서고는 했다.

 

오늘날에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를 통해 한국에 잘 알려진 영국의 웨스트 앤드 뮤지컬이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원조처럼 통하지만, 웨스트 앤드의 뮤지컬조차 사보이 극장에서 잘 상연되었다고 하여 사보이 오페라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시절에는 비엔나 오페레타를 열심히 베끼는 수준이었다.

그러고도 당대의 영국 레퍼터리들, 즉 이른바 사보이 오페라들은 지금도 국제적으로는 듣보잡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비엔나가 재채기하면 런던의 웨스트 앤드는 드러눕고, 뉴욕 맨해튼의 브로드웨이는 사경을 헤메고는 했다.

 

그래도 베를린은 그들 독자적인 캬바레 풍의 음악으로 독자성을 갖게 되었지만 앵글로색슨 족의 나라들은 재주가 따라주지 않았는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개츠비의 시대 배경으로 잘 알려진 1920년대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비엔나를 모방하고도 약효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런던의 웨스트 앤드는 모방을 하다가 오늘날 영어권 대중음악의 원조 쯤 되는 사운드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지만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그나마도 안되어 그냥 베끼더니 그러고도 안되어 아얘 비엔나 오페레타의 작곡가들과 연출가들을 통째로 수입하여 일을 대신 맡기고서야 성장한 것이다.

 

그 후 잘 알려진 대로 비엔나의 작곡가들과 독일의 작곡가들이 헐리우드 영화음악을 사실상 대신 만들어주다시피 했고, 비교적 성공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을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각색할 때 그 음악들을 손봐주었다.

헐리우드 고전영화들이 극 중 화려한 무도회나 축제 장면, 파티 장면, 혹은 군대의 개선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오페라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특히 비엔나 오페레타 작곡가들의 영향이 큰 탓도 있다.

 

이후 미국 대중음악은 재즈 음악에서부터 이 같은 비엔나와 이탈리아, 중남미 등에서 온 작곡가들의 편곡으로 세련된 컨템포러리 음악으로 발전해 간다.

이 과정에서 비엔나 작곡가들의 역할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경험을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헐리우드 영화음악을 만들면서 발휘한 관현악 편곡 솜씨를 옮긴 것이어서 이것이 한국인에게는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의 음악 제작 과정을 옮긴 것처럼 보인 것 뿐이다.

이러다가 마침내 미국이 탄생시킨 슈퍼스타가 바로 쥬디 갈런드와 에바 가드너였고, 뒤를 이어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이어서 등장하면서 한국인에게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알려진, 어메리컨 컨템포러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컨템포러리 대중음악의 태생은 1970년대까지도 중남미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편곡가들에 의해 음반의 제작 실무가 이뤄진 사실에서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원조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에 전해진 비엔나 오페레타가 있었던 것이다.

 

오페레타는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이어지는 음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천적으로 대중음악이었다.

그런데 이 오페레타인 '비너 블루트'(비엔나 기질)은 근래 주요 히트곡 등을 편집하여 뮤지컬로 만드는 최근 추세에 대해서까지도 원조인 오페레타이니, 그야말로 오페레타가 영미 대중음악 문화권의 큰 스승임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실은 이 오페레타의 정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초기 왈츠 작품 등을 아돌프 뮐러(1801-1886)가 편곡해서 오페레타로 각색한 결과물이어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도 많이 썼다.

 

초연은 정작 아돌프 뮐러의 사후 13년만인 1899년 10월 26일 비엔나의 칼극장(Carl Theater)에서 초연되었다

칼극장은 현재의 비엔나 네스트로이 플라츠에 있던 극장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해 6월 3일 세상을 떠났으니 아돌프 뮐러 사후 13년만이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사후 약 4개월 후에 초연된 셈이다.

극장감독이며 오페라 예술감독인 프란츠 야우너(Franz Jauner: 1831-1900)가 제작을 맡았다.

 

야우너는 '비너 블루트'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명성에 힘 입어서 대성공을 거둘것으로 생각하고 제작비를 많이 들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영국의 시드니 존스(Sidney Jones: 1861-1946)당시에는 시드니 존스(Sidney Jones)의 오페레타 게이샤(The Geisha)가 비엔나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비너 블루트'는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어서 초연 이래 30회 공연으로 마감하였다.

제작을 맡은 야우너는 '비너 블루트'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파산하여 결국은 1900년 2월 23일 칼극장의 자기 사무실에서 권총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5년후 '테어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지금의 비엔나 강변 극장이 '비너 블루트'의 대본을 일부 수정하고 음악도 다시 손질을 하여 리바이벌하므로서 비로소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오페레타의 제작 및 상연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영화제작 과정을 연상케도 하는 듯 할 것이다.

당연하다.

오페레타는 태생적으로 대중음악이었으며 현대 영화와 뮤지컬의 흥행이 비엔나에서 오페레타를 흥행시키던 장삿꾼이 미국에 물건너와서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위해 일한 결과가 21세기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니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스토리나 음악은 영상물을 직접 보는 것 만 하지 못하므로 본 리뷰에서는 생략한다.

본래 비엔나 블루트의 여러 레코딩 중에서 니콜라이 겟다가 극 중 체들라우 백작을 연기하고,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 백작부인 가브리엘레로 분장하고, 에리카 쾨트가 프란치를 연기하여 취입한 음반이 백미로 꼽히지만, 영상물로 만들어진 것 중에는 본 작품 만한 것이 드물다.

 

캐릭터가 기억에 남도록 연출되어 있는 것 부터가 오늘날의 상업적인 캐릭터 디자인의 원조 역시 오페레타임을 절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특히 상대역인 르네 콜로의 연기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뜻 밖에 압권이다.

극 중 배역은 아무리 잰 척을 해도 다소 덜 떨어진 구석을 숨기지 못하는 부유층 독신남인데, 그러고도 만인에게 인기가 있음직한 인물이어야 한다.

비엔나 오페레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극 중 주연 남성은 대개 신분이 높은 고급 건달이기 일쑤인데 그러고도 누구도 싫다는 사람은 없는 캐릭터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르네 콜로는 딱 그 배역에 맞게 삼룡이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기발하게 살려냈다.

필자가 비너 블루트의 명반도 많고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1971년도 영상물을 영상물로는 으뜸이라고 감히 추천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슨 인연인지 르네 콜로도 독일에서는 대중음악에 관한한 중대한 인물로서 그 스스로부터 대중가요 가수로 인생의 출발을 하였고 그의 부친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던 발터 콜로였다.

실로 모든 면에서 대중음악의 원조뻘 되는 작품을 대중음악과 깊은 인연을 가진 가수가 출연하여 연기한 영상물이다.

 

극 중 주연을 맡은 소프라노 잉게보르그 할슈타인의 젊은 시절 미모와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특히 잉게보르그 할슈타인의 영상 속 분장이 1970년대 초반 화장의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당시의 화장을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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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푸치니 : 투란도트
푸치니 (Giacomo Puccini), 도밍고 (Placido Domingo) 외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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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영상물을 입수했다.

이 보다 더 앞선 수작들이 많이 거론되지만 메트의 본 연출을 앞서는 투란도트는 감히 없다고 단언한다.

캐릭터 성격을 너무 잘 살린 것이 포인트다.


우선 칼라프를 연기한 플라시도 도밍고는 이판사판에 처하고보니 헛베짱을 부리는 당돌한 자를 연기하는 것도 연기거니와 이제 그 위기를 벗어났다 싶자마자 객기를 못버린 젊은 승자의 연기라는 것은 또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그냥 잘 연기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 백미는 2막이 끝나기 직전에 투란도트의 뒷태를 바라보는 뻔뻔한 행동거지와 표정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페라라는 것이 그냥 노래 잘 부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분장이 그럴싸하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 점에서 에바 마톤의 연기도 만만치 않았다.

에바 마톤의 투란도트는 투란도트의 첫 등장 장면에서부터, 투란도트라는 극 중 캐릭터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내어 주었는데, 보다 고전인 영상물들을 고루 비교해보면 에바 마톤에 비해 잔인한 얼음공주다운 캐릭터를 지나치게 잘 부각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에바 마톤이 역대 투란도트를 모두 극복했다고 평하는 이유다.

 

에바 마톤의 투란도트는, 마치 자신이 그런 얼음공주 아닌가보다고 세상사람들이 눈치채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예민해진 사람같은 표정을 하고 등장한다.

특히 칼라프가 2번째 문제까지 알아 맞히자 당혹스러워 할 때의 표정 연기는, 아직 철없는 부잣집의 철부지 딸네미가 여걸 행세 하다가 뜻대로 안되니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울상에 가까운 것은 정말 백미였다.

이는 그 순간을 잘 잡아낸 카메라맨의 순간 포착 덕택도 있으며, 연출가의 역량 덕택이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에바 마톤의 인상 자체가 조금만 연출하면 원래 그런 표정 연기에 걸맞는 인상이어서로 보이는데, 이는 그런 캐릭터 해석에 따라 배역 선정 과정에서 처음부터 의도되었던 결과로 보인다.

최근까지 세계 각국에서 상연되는 수많은 투란도트들의 분장이 대부분 경극을 모방하여 과장된 화장을 하고 나오는 것과 비교할 때 꽤 수수한 화장만 하고 나온 데에서 입증된다.

이 점에서 본 영상물에 담긴 1988년 당시 메트의 투란도트 공연은 처음부터 배역 선정 과정에서 점수 먹고 들어갔던 공연이었다고 함이 적절할 것이다.

 

이 후의 연기는 그야말로 자신도 그런 얼음공주 맞다고 애처롭게 억지쓰는 부잣집 노처녀 그 자체였다.

특히 3막에서 밤의 밀회 장면에서는 남자에게 무너진 노처녀 연기는 어떻게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데, 그 점에서 투란도트는 뜻 밖에 에로틱한 오페라라고 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을 오페라 무대에 역이동시켜놓은, 참 양키스러운 오페라구나 싶은데 그 점이 오히려 장래 오페라의 매력요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입장에서는 이 만한 영상물은 정말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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