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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요한 스트라우스 : 비엔나 기질
요한 스트라우스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8년 6월
평점 :
대중음악에는 민속음악의 전통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음악들의 수 많은 장르들을 구성하고 있지만, 역시 전세계적으로 상업적인 시장을 장악하고 좌우하는 것은 Contemporary 음악이다.
이 컨템포러리 음악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세련된 코드들로 진행되는 화성법, 난이도가 꽤 높은 기악법을 통한 음향 효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곡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이르는 진행에 대한 구성의 다양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컨템포러리 가요들의 그 모든 것들이 시작된 뿌리가 한국에서는 미국 뮤지컬인줄 잘못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 중에서도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아닌 헐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인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짜 정답은 바로 비엔나 오페레타다.
20세기 초엽, 즉 우리 한국이 한일합방을 당할 당시만 해도 미국 뮤지컬이란 1970년대 한국의 방송가에서 인기높았던 버라이어티 쇼우 수준이었고, 비엔나 오페레타가 수입 상연될 때마다 생사의 기로에 서고는 했다.
오늘날에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를 통해 한국에 잘 알려진 영국의 웨스트 앤드 뮤지컬이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원조처럼 통하지만, 웨스트 앤드의 뮤지컬조차 사보이 극장에서 잘 상연되었다고 하여 사보이 오페라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시절에는 비엔나 오페레타를 열심히 베끼는 수준이었다.
그러고도 당대의 영국 레퍼터리들, 즉 이른바 사보이 오페라들은 지금도 국제적으로는 듣보잡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비엔나가 재채기하면 런던의 웨스트 앤드는 드러눕고, 뉴욕 맨해튼의 브로드웨이는 사경을 헤메고는 했다.
그래도 베를린은 그들 독자적인 캬바레 풍의 음악으로 독자성을 갖게 되었지만 앵글로색슨 족의 나라들은 재주가 따라주지 않았는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개츠비의 시대 배경으로 잘 알려진 1920년대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비엔나를 모방하고도 약효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런던의 웨스트 앤드는 모방을 하다가 오늘날 영어권 대중음악의 원조 쯤 되는 사운드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지만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그나마도 안되어 그냥 베끼더니 그러고도 안되어 아얘 비엔나 오페레타의 작곡가들과 연출가들을 통째로 수입하여 일을 대신 맡기고서야 성장한 것이다.
그 후 잘 알려진 대로 비엔나의 작곡가들과 독일의 작곡가들이 헐리우드 영화음악을 사실상 대신 만들어주다시피 했고, 비교적 성공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을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각색할 때 그 음악들을 손봐주었다.
헐리우드 고전영화들이 극 중 화려한 무도회나 축제 장면, 파티 장면, 혹은 군대의 개선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오페라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특히 비엔나 오페레타 작곡가들의 영향이 큰 탓도 있다.
이후 미국 대중음악은 재즈 음악에서부터 이 같은 비엔나와 이탈리아, 중남미 등에서 온 작곡가들의 편곡으로 세련된 컨템포러리 음악으로 발전해 간다.
이 과정에서 비엔나 작곡가들의 역할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경험을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헐리우드 영화음악을 만들면서 발휘한 관현악 편곡 솜씨를 옮긴 것이어서 이것이 한국인에게는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의 음악 제작 과정을 옮긴 것처럼 보인 것 뿐이다.
이러다가 마침내 미국이 탄생시킨 슈퍼스타가 바로 쥬디 갈런드와 에바 가드너였고, 뒤를 이어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이어서 등장하면서 한국인에게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알려진, 어메리컨 컨템포러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컨템포러리 대중음악의 태생은 1970년대까지도 중남미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편곡가들에 의해 음반의 제작 실무가 이뤄진 사실에서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원조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에 전해진 비엔나 오페레타가 있었던 것이다.
오페레타는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이어지는 음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천적으로 대중음악이었다.
그런데 이 오페레타인 '비너 블루트'(비엔나 기질)은 근래 주요 히트곡 등을 편집하여 뮤지컬로 만드는 최근 추세에 대해서까지도 원조인 오페레타이니, 그야말로 오페레타가 영미 대중음악 문화권의 큰 스승임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실은 이 오페레타의 정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초기 왈츠 작품 등을 아돌프 뮐러(1801-1886)가 편곡해서 오페레타로 각색한 결과물이어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도 많이 썼다.
초연은 정작 아돌프 뮐러의 사후 13년만인 1899년 10월 26일 비엔나의 칼극장(Carl Theater)에서 초연되었다
칼극장은 현재의 비엔나 네스트로이 플라츠에 있던 극장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해 6월 3일 세상을 떠났으니 아돌프 뮐러 사후 13년만이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사후 약 4개월 후에 초연된 셈이다.
극장감독이며 오페라 예술감독인 프란츠 야우너(Franz Jauner: 1831-1900)가 제작을 맡았다.
야우너는 '비너 블루트'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명성에 힘 입어서 대성공을 거둘것으로 생각하고 제작비를 많이 들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영국의 시드니 존스(Sidney Jones: 1861-1946)당시에는 시드니 존스(Sidney Jones)의 오페레타 게이샤(The Geisha)가 비엔나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비너 블루트'는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어서 초연 이래 30회 공연으로 마감하였다.
제작을 맡은 야우너는 '비너 블루트'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파산하여 결국은 1900년 2월 23일 칼극장의 자기 사무실에서 권총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5년후 '테어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지금의 비엔나 강변 극장이 '비너 블루트'의 대본을 일부 수정하고 음악도 다시 손질을 하여 리바이벌하므로서 비로소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오페레타의 제작 및 상연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영화제작 과정을 연상케도 하는 듯 할 것이다.
당연하다.
오페레타는 태생적으로 대중음악이었으며 현대 영화와 뮤지컬의 흥행이 비엔나에서 오페레타를 흥행시키던 장삿꾼이 미국에 물건너와서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위해 일한 결과가 21세기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니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스토리나 음악은 영상물을 직접 보는 것 만 하지 못하므로 본 리뷰에서는 생략한다.
본래 비엔나 블루트의 여러 레코딩 중에서 니콜라이 겟다가 극 중 체들라우 백작을 연기하고,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 백작부인 가브리엘레로 분장하고, 에리카 쾨트가 프란치를 연기하여 취입한 음반이 백미로 꼽히지만, 영상물로 만들어진 것 중에는 본 작품 만한 것이 드물다.
캐릭터가 기억에 남도록 연출되어 있는 것 부터가 오늘날의 상업적인 캐릭터 디자인의 원조 역시 오페레타임을 절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특히 상대역인 르네 콜로의 연기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뜻 밖에 압권이다.
극 중 배역은 아무리 잰 척을 해도 다소 덜 떨어진 구석을 숨기지 못하는 부유층 독신남인데, 그러고도 만인에게 인기가 있음직한 인물이어야 한다.
비엔나 오페레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극 중 주연 남성은 대개 신분이 높은 고급 건달이기 일쑤인데 그러고도 누구도 싫다는 사람은 없는 캐릭터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르네 콜로는 딱 그 배역에 맞게 삼룡이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기발하게 살려냈다.
필자가 비너 블루트의 명반도 많고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1971년도 영상물을 영상물로는 으뜸이라고 감히 추천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슨 인연인지 르네 콜로도 독일에서는 대중음악에 관한한 중대한 인물로서 그 스스로부터 대중가요 가수로 인생의 출발을 하였고 그의 부친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던 발터 콜로였다.
실로 모든 면에서 대중음악의 원조뻘 되는 작품을 대중음악과 깊은 인연을 가진 가수가 출연하여 연기한 영상물이다.
극 중 주연을 맡은 소프라노 잉게보르그 할슈타인의 젊은 시절 미모와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특히 잉게보르그 할슈타인의 영상 속 분장이 1970년대 초반 화장의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당시의 화장을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