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지속되는 유아기와 성장경험

나는 사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노라면 
정체성의 감각이라는 것이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전문 분야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소 겁이 났고,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내가 무지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뭔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일과, 
안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 현실을 직면하려고 
애쓰는 일은 달랐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위해 
신중하게 쌓아 올려온 정체성은 
무너져 내려야만했다 - P16

하지만 멈춰 서서 ‘무의식‘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것이 충격적이고, 가증스러우며 
무섭기까지 하다는 걸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알게 되는 걸 감당할 수
없어서 보지 않아도 되도록 땅 밑으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사람이 진짜 우리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직면하는 건 
끔찍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다. - P17

정신분석은 고통을 완화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고,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일이다.
지금껏 내 감정들을 다스려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구나 하는
희미한 자각이 싹텄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이른바 ‘정체성‘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정체성이 아니고,
‘착한 사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역시
정체성이 아니다. 
이런 수식 어구들은 진정한 나와 
접촉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방법들에 불과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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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냉수를 붓는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나
물을 갈고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졌다.
얼굴을 갖다 댄 채.

"그런데……… 뭐가 보이나요?"
"응?"
"팥을 왜 그렇게 유심히 보세요?"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야." - P37

내가 팥을 삶는 모습을 보고 사장님은 종종 물었죠. 팥에 얼굴을 대고 있는 나에게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고 말입니다. 나는 그저 듣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해도 사장님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에 그냥 애매하게 흘려버렸지요.

팥의 안색을 살피는 것. 
팥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건 팥이 겪어온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어떤 바람을 맞으며 컸는지 그 여행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언어를 갖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상점가를 지나는 사람들은 물론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아니, 햇살이나 바람 같은 존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장님에겐 잔소리 많은 할머니였는데도 정작 중요한 걸 전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습니다. - P160

사장님을 생각할 때면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오는바람이 
뭔가 불안하게 속삭입니다. 
바람이 사장님의 안부를 물으라고 합니다. 아마 나 때문에 어떤 소문이 퍼졌겠지요. 
그 상태가 아직도 이어지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가 물러날 때를 놓친 탓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아도 
세상의 싸늘한 시선에 밟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 P161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요

우린 자유로운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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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공기라도 마시나 싶게 입을 열더니
문득 자기 등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벚나무, 누가 심었나?"
"예?"
도쿠에는 벚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 벚나무"라고 다시 말했다.
센타로도 한창 피기 시작한 꽃들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누군가가 심었겠지?"
"글쎄요, 저도 여기 출신이 아니라서."
도쿠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센타로가 고무 주걱을 다시 쥐는 걸 보더니 
"또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유리문 앞에서 물러났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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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사람들은 복잡한 로마와 폭염을 피해 지방으로 떠났다. 로마 사람들에게 삶의 예술이란 ‘오티움otium‘ 으로 ‘유유자적‘이다. 비생산적인 것에만 몰두하며 영혼과 정신을 높이 갈고닦는 시간을 가리킨다. 독서와 철학, 명상, 친구들과의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오티움과 반대되는 말로 ‘네고티움negotium‘이 있다. 네고티움은 분주함을 의미한다. 바쁘게 하는 일, 시간표와 스케줄, 의무와 제약으로 이루어진 삶이 네고티움에 속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로마의 유산인 오티움을 잃어버렸다. - P141

인생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계속 나답게 사는 것. 아무리 인생이 괴롭고 답답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을 잃거나 거의 모든 것을 잃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다. - P209

진실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꾸밈도 양보도 없다. 진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본연의 모습과 마주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편하고 감미로운 것을 바란다.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것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우리의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 
선동된 여론은 대체로 신중하지 않으나
문제는 대세인 의견일수록 
우리의 마음에 쉽게 와닿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바람이고,
퍼뜨리는 것은 가십이다.

이렇게 우리는 대세에 쉽게 떠밀려간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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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 P18

20년 후에, 지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최승자 - P64

두이노의 비가 中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내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 P84

기러기

메리 올리버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세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조약돌 같은 빗방울은
풍경을 가로질러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강을 넘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P108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 

이하를 내려다볼 만큼
조선 최고라 했지.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어찌 네게 걸맞을까?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굴창이리라.


김시습 - P118

아이스크림의 황제

- 윌리스 스티븐스

큰 시가 마는 사람을 불러
근육질인 사람으로, 그리고 휘젓게 해
부엌의 컵 속 색정적인 응유를 말이야.
처자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꾸물거리게 내버려둬, 
소년들에게는 꽃을 
지난달 신문에 말아서 가져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빠진
전나무 경대에서 꺼내, 그 시트 말이야
한때 그녀가 공작 비둘기 수놓았던 
그것을 펼쳐서 그녀의 얼굴을 덮도록 해,
딱딱한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싸늘하고 또 묵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램프의 빛줄기를 잘 고정시켜 놓도록.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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