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 자신을 정의를 욕망하는 비자발적 탐정으로 본다면, 내가 탐정이자 목격자이기도 한 사실이 어머니의 병을 미해결 범죄로 만들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악당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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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체리)
하지만 체리가 담긴 그릇을 그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내 친구(남자)가 말했다. 내 어휘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동의할 수 있을 듯하다.
어머니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땐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떠났고 자신의 시간을 찾았다.

그런 시간을 찾는 게 우리가 원하는 전부다.
당신은 시간을 찾자마자 
더 많은 시간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사이에 더 많은 시간을.
충분한 시간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이상하다.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죽는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다.

홀로코스트를 


직접 겪으면,
결코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생애 동안 그것이 
모든 것에서 울려 퍼지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종종 말할 거리가 바닥난다.
그리고 늘 함께 드는 생각은
내가 말한 모든 게 후회된다는 것.

내가 자기 경멸에 빠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느낌은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영문을 알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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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책을 마구 들일 수는 없어서 냉장고를 털듯 책장을 조금이라도 비워보려 하지만 워낙 속도가 더디기도 한데다 새 책은 계속 나오니까, 또 신간을 읽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해 책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고 그만큼 가슴은 답답해진다.
바로 대여가 가능한 신간은 먼저 빌려 읽어본 후 구매 여부를 검토하기로 하는데 이 책은 목차만으로도 책값은 한다. 어째서인지 이런 주제의 책이 어렵고 지루할 거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은 독서의 즐거움이 충만한 책이다. 다만 후루룩 읽고 반납할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므로 구매 후 제대로 된 독서를 시작하는 편이 현명할 듯하고, 프롤로그 외 12장, 70개의 소주제만 읽어보아도 다차원의 공감이 일어난다. 어지간한 책에는 밑줄을 주욱주욱 긋고는 하지만 어쩐지 이 책은 밑줄 따위를 남기고 싶지는 않으므로 우선 가볍게 읽고 소장본은 소중히 간직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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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열정과 독립적인 욕망을 지닌 여자, ‘먹이다‘라는 말의 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먹이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충실하고 한결같이 먹이는 여자는 거기 없다.












나도 그 불안을 잘 알았다. 
지금도 그 불안을 잘 알고 있으며, 음식과 칼로리와 사이즈와 무게가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떨칠 수 없는 걱정이 얼마나 완강하고 절박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도 잘 안다. 마치 허기에 완전히 굴복하면 큰 상해라도 입게 될 것 같고 도저히 식욕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만 같은 기분.

너무 많이 갈망하지 마라, 너에게 주어진 한계선 밖으로 나가지 마라.

지금 이 사진이 왜 웃기다고 생각하는 거죠? 설명해보세요. 여러분과 내게 있는 존엄할 권리가 저 여자한테는 없습니까? 몸무게가 좀 더 나간다고 해서 그 권리가 부인되는 겁니까?

영리하게도 아름다움으로 변장한 채 살금살금 숨어 다니며 여자들에게 뚱뚱함에 대한 불합리하고도 병적인 공포를 주입하는 냉소적인 악당으로 ‘문화‘를 꼽을 것이다.

이것은 자유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뼛속 깊이 느끼지 못하거나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격차, 즉 한쪽에 있는 개인적 자유와 다른 쪽에 있는 정치적 힘 사이의 이 끈질긴 불균형이 욕망 뒤에 자리한 불안이라는 요인을 증폭시킨다고 생각한다. 이 격차는 여자들에게 뭔가 계산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남기고, 선택들이 편파적이며 단서들을 잔뜩 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선택할 자유는 바꿔 말하면 실수할 자유, 더듬거리다 실패할 자유, 자신의 결점과 한계와 두려움과 비밀과 정면으로 대면할 자유, 자아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끔찍한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갈 자유다.
나는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욕구 뒤에서 끊임없이 뛰고 있는 동요의 맥박이라고 생각한다.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쉬우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욕망의 제단에서 예배하는 것이 모든 열정의 표현과 모든 욕구의 만족까지 고려해 자신만의 제단을 건설하는 것보다 쉽다. 다시말해서, 음식과 쇼핑과 외모 같은 것에 엄청나게 골몰하는것은 허기에 진심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기보다는 허기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어마어마한 노력이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무엇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는 인스턴트커피 물을 끓였고, 그게 집안일에 대한 아버지의 야망이 가장 멀리 나아간 지점이었다.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면 유화에서 나는 톡 쏘는 테레빈유 냄새와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게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어머니의 특성보다 모성적이고 남들을 챙기던 어머니의 특성에 대한 인상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무심하게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자신의 필요들은 뒤로 미뤄두도록, 자신의 욕망과 추구는 남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로 승화시키도록, 자신의 실망은 삼켜 삭이도록 교육받고 자란 여자는 자신에게 없는 그 권위와 권한의 감각을 딸에게 어떻게 전해줄까?

여자의 몸은 수정하고 변장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미흡하고 결함 있고 어디 내놓을 만한 게 못 된다는 믿음에 의해 강화된,

물론 여기에는 거대한 아이러니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무리 많은 노력, 아무리 많은 토닝과 개선과 위장과 결점 지우기를 해도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노력이 약속해주는 자기 수용은 실제로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유로 가는 문이 1, 2분 이상 열려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레슬리에게는 수동적인 면이나 연약한 면, 나약한 면, 위협적이지 않은 면, 예의를 차리며 주저하는 면이 전혀 없다. 레슬리에게서는 이 문화에서 엄청나게 희귀한 조합이 보인다. 사이즈와 무게, 그리고 티끌만 한 변명도 찾아볼 수 없음이라는 조합이.

외현화하는 문화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분별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비전은 분명히 만들어진다. 비록 그 비전이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무엇이 효과 있고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는 일에서, 즉 개인적 정치에서는 분명 변화를 일으킨다. 

영원히 물건에, 사람에, 행동에 집착하며 대체물을 찾으려는 갈망들은 결국 자체의 생명을 갖게 되고, 하나의 조직 원리가 되며, 매번 고통과 갈망에 대한 초월을 약속하지만 번번이 실망시키고 마는 희망의 파편들이 된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금세 지나가는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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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욕망들과 싸우도록 훈육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실상 모든 전선에 그 싸움을 위한 증원군이 파병된다.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암묵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욕구에 관한 이야기다. 

갈수록 더 시각에 치중하고 상업성이 짙어지는 세계, 여성의 형태가 무자비할 정도로 외현화되는 세계, 여성의 욕망에 관한 관념이 너무나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있는 세계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자신의 욕망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이야기다. 전통적인 심리 구조와 사회구조가 얼마나 오래도록 멀쩡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전히 소녀들에게 자기부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권장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며, 40년에 걸친 법적·사회적 변화가 진정한 대안적 변화를 아직 일구어내지 못한 까닭에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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