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 P18

20년 후에, 지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최승자 - P64

두이노의 비가 中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내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 P84

기러기

메리 올리버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세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조약돌 같은 빗방울은
풍경을 가로질러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강을 넘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 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리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 P108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 

이하를 내려다볼 만큼
조선 최고라 했지.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어찌 네게 걸맞을까?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굴창이리라.


김시습 - P118

아이스크림의 황제

- 윌리스 스티븐스

큰 시가 마는 사람을 불러
근육질인 사람으로, 그리고 휘젓게 해
부엌의 컵 속 색정적인 응유를 말이야.
처자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꾸물거리게 내버려둬, 
소년들에게는 꽃을 
지난달 신문에 말아서 가져오라고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빠진
전나무 경대에서 꺼내, 그 시트 말이야
한때 그녀가 공작 비둘기 수놓았던 
그것을 펼쳐서 그녀의 얼굴을 덮도록 해,
딱딱한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싸늘하고 또 묵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램프의 빛줄기를 잘 고정시켜 놓도록.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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