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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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 신간 <그림 그리는 과학자>는 형태학을 기반으로 미증유의 종을 발굴하는 생물학자 이동주가 집필한 저작이다. 동아대학교 응용생물학과에서 곤충을 탐구하고 한양대학교와 영국 자연사 박물관을 거쳐 신라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국내 일호 자연과학 책방 '동주'를 운영하며 소통해 왔다. 이 책은 17세기부터 현대까지 자연의 신비를 도화지에 옮긴 학자들의 집념을 추적한다.


언어의 장벽을 통과하는 직관의 힘

글은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지만 언어 장벽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반면 그림, 세밀화는 국경을 관통하여 생명체의 온전한 실재를 보여준다. 책머리 저자의 말처럼 자연학자들에게 묘사는 필연적 선택이었다. 현장에서 펜과 수첩은 연구자의 분신과 같다.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 역시 험난한 여정 속에서 기압계, 시안계 등과 함께 필기구를 움켜쥐었다. 그가 작성한 자연의 단면도는 육천여 종의 생태 분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도록 돕는다.


오해와 편견에 저항한 관찰자들의 동반

진리를 추구하는 경로는 외롭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자연발생설이라는 완강한 시대적 착각에 대항했다. 그녀는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번데기를 거쳐 날아오르는 우화 과정을 판화로 담아냈다. 이는 형태학적 규명이자 역사학자 내털리 제먼 데이비스가 헌사했듯 최초의 생태학적 업적이다. 찰스 다윈의 갈라파고스 핀치새 부리 스케치 역시 단순한 모사를 넘어 자연선택설의 주춧돌,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그는 생물의 지형도를 그리며 미지의 세계를 탐구했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박물의 다채로운 흔적

도화지는 서구 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의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의 <전어지>에서 한반도 수족을 독자적 체계로 구분했다. 정학우, 이규경, 남계우, 유희 등 조선 지식인들은 집요한 관찰로 향토 박물학을 세웠다. 에른스트 헤켈의 방산충 묘사는 미시 세계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메리 애닝이 석판에서 찾아낸 화석 도판은 유실된 과거를 선명하게 증명한다.


버제스 혈암을 해독한 고생물학자들의 집념

찰스 월컷, 해리 블랙모어 휘팅턴, 스티븐 제이 굴드로 이어지는 탐구자들의 계보는 고대 생물의 폭발적 진화를 화폭에 담아냈다. 버제스 혈암에서 발굴된 기상천외한 화석들은 단편적인 렌즈 촬영만으로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카메라는 빛과 각도에 따라 왜곡된 결과물을 낳을 수 있지만, 연구자의 지난한 스케치는 삼차원의 실체를 이차원 평면에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사진 도감이 놓치기 쉬운 피사체의 은밀한 굴곡조차 펜 끝에서 신뢰성을 획득한다. 뱃멀미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험지에 뛰어든 숱한 해양 생물학자들이 굳이 스케치를 고집한 까닭은 찰나의 시각적 편견을 배제하고 생태의 숨겨진 진실을 후세에 온전하게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연필에서 AI 인공지능 시대로 이어지는 관찰의 확장

기록을 향한 인류의 도구는 멈추지 않고 진화한다. 흑연과 낡은 수첩에서 출발한 도해는 탁월한 전자현미경을 거쳐 이제 인공지능 기술과 접목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대를 맞이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도안 작업이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선을 긋는 행위가 미미한 예술적 재능의 발현이 아니라 대상의 오류 없는 전달임을 분명히 밝힌다. 과학, 생태에 관심 있는 일반인 역시 책에 수록된 견고한 분류학 지식을 이정표 삼아 생태 세밀화에 직접 도전할 수 있다. 산야에 핀 들풀이나 곤충의 얼개를 찬찬히 뜯어보고 기존 도감의 기준에 맞춰 도화지를 채우다 보면, 누구든 막연했던 삼라만상을 명증한 이해의 대상으로 치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연필을 쥐었던 까닭..

삼라만상의 질서를 밝히려는 열정은 고결하다. 감춰진 존재를 드러내려는 의지는 자연을 향한 숭고한 경외에서 출발한다. 현대 생물학자인 저자가 국제 학회에서 치밀한 도판으로 신종을 설득하고 학술지에 등재한 사건은 도해의 설득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손끝에서 탄생한 획들은 정량화된 수치보다 얽히고설킨 뭇 생명의 연대를 수월하게 납득시키는 강력한 무기다.

저자는 책의 맺음말을 통해 뛰어난 연구든 아니든 모든 기록은 소중하며, 이 저작이 훗날 생명의 서사시를 다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 뻗어가기 위한 '첫 번째 서문'이라고 고백한다. 십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숱한 편집자를 거치며 다듬어진 원고는 저자 자신이 지닌 학자적 고집과 집념의 산물이다.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이


"점과 선으로 기록된 옛 문헌 속 동식물의 도판을 감상하고 그러한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다. 긴 숲을 통과한 기분이다"


라고 찬사를 보냈듯, 독자는 이 책을 덮는 순간 거대한 생태계의 복원 현장을 빠져나오는 듯한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에서 새를 실물 크기로 옮긴 존 제임스 오듀본, 나아가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신사임당의 곤충 기록에 이르기까지.. 펜과 붓으로 빚어낸 이 치열한 자연학의 역사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명멸하는 생명들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진다.


신간 <그림 그리는 과학자>단순히 아름다운 화집을 넘어,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의 동반자로서 짊어져야 할 시선의 책임을 묻는 생태 철학서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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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라이프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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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매스커레이드 라이프>는 에도가와 란포상, 나오키상 등을 휩쓸며 일본 미스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간 장편소설이다. 김은모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긴 이 작품은 누적 판매 550만 부를 돌파한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로 반가운 귀환을 알린다.

다작 속에서도 늘 새로운 무대를 창조하는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일본 추리소설 신인상 심사 현장이라는 출판계의 이면을 풍자적으로 녹여내며 특유의 정교한 서사를 선보인다. 역자의 말에서 언급되었듯 <왜소소설>과 <흑소소설>에서 보여준 현지 출판계 바닥의 민낯이 '호텔'이라는 공간과 결합하여 한층 복잡한 복선으로 탄생한 소설이다. 단순한 트릭 풀이를 넘어 인간 내면의 숨겨진 욕망과 다면적인 심리를 쫓는 독자, 닫힌 공간이 주는 서스펜스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가면무도회의 새로운 무대, 문학상 심사위원회장

이번 서사의 중심 무대는 샹들리에 아래 익명성이 보장되는 코르테시아 도쿄 호텔이다. 이곳에서는 유명 출판사 규에이샤가 주최하는 일본 추리소설 신인상 심사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와 동시에 경찰은 호텔에 은밀한 잠복 수사를 벌이는데, 신인상 유력 후보인 아오키 하루마가 과거 연인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나며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 속으로 빠져든다. 수사 과정에서 닛타는 오이즈미가구엔 가족 살인 사건 기사를 검색하며 단서를 찾으려 애쓰지만, 이는 일가족을 비탄에 잠기게 한 참혹한 친족 살인으로 또 다른 물줄기로 서사가 흐른다. 과거 여성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쓴 소설이 최종 수상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얄궂은 역설 속에서, 호텔은 치밀한 두뇌 싸움이 벌어지는 무대로 변모한다. 계획대로 수상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 당사자가 체포될 경우 벌어질 사회적 파장과 언론의 광기를 예견하는 대목은 서사의 흡인력을 끌어올린다. 살인 사건과 연루된 자가 쓴 추리소설은 심사 위원들의 평이 엇갈리며 작품성과는 별개로 출판계의 구미를 당기기 시작하는데.. 닛타와 나오미, 경찰들, 유가족들, 신원 불상의 난입자의 가면이 벗겨지며 벌어지는 예측 불가의 상황은 <매스커레이드 라이프>의 흥분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보안과장 닛타와 호텔리어 나오미의 파트너십

시리즈의 최신작으로서 돋보이는 차별점은 단연 주인공 닛타 고스케의 변화된 위치다. 전작들에서 경시청 소속 수사관으로서 탁월한 직관을 발휘했던 그는 이제 경찰 조직을 떠나 코르테시아 도쿄 호텔의 보안과장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 엘리트 형사 신분으로 프런트를 지휘하는 호텔리어 야마기시 나오미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사건의 실마리를 풀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온전한 호텔의 일원으로서 투숙객의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수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다. 수사를 위해 아즈사 형사를 호텔리어로 위장시키려 하거나 무리한 정보 제공, 불법적인 촬영, 증거 수집 등을 요구하는 옛 동료들의 압박 속에서, 호텔리어의 철칙과 정의 구현 사이에서 고뇌하는 닛타와 나오미의 심리전이 두드러진다. 닛타의 아버지, 변호사 '가쓰히사'가 등장하여 과거 그가 담당했던 오이즈미가구엔 가족 살인 사건이 남긴 생채기,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각자의 본심이 폭로되는 가면극의 진상

호텔이라는 열린 공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긴 채 다채로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과 같다. 사건의 중심에 선 후쿠나가 요리코와 후쿠나가 나나에 모녀는 단순한 투숙객이 아니다. 이들은 "가해자의 유족이자, 피해자의 유족"(p.354)으로서 세상의 싸늘한 시선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면을 쓰고 코르테시아 호텔의 회전문 안으로 들어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속 살인 사건의 전말과 문학상 후보작의 플롯을 교묘하게 겹쳐 놓으며 진실을 가린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작가이자 용의자, 아오키 하루마의 실체 역시 반전을 거듭한다. 그는 타인을 죽음으로 내몬 악인이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인 시한부 인생으로부터 애인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도피하였음이 밝혀진다. 만약 생존했다면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의 동생이 살인범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칼을 빼앗아 목숨을 끊으려 했을 만큼(p.383) 이타적인 내면을 지닌 인물임이 밝혀지며 비극의 실타래가 풀린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아버지 가쓰히사와 오랜 대화를 나눈 닛타에게 나오미가


"마음속에 가면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때로는 가면을 쓰고 때로는 가면을 벗고서 살아가는 거죠.."_427p


라고 읊조리는 대목은 뇌리에 강렬히 남는다. 누구도 섣불리 예측하기 힘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킨, 입체적인 서사는 인간의 본질을 되묻게 하며 짙은 여운을 선사한다.


스크린으로 이어질 기대감과 소설 속 소설

전작인 <매스커레이드 호텔> & <매스커레이드 나이트>가 기무라 타쿠야, 나가사와 마사미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바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두 배우는 닛타와 나오미를 리얼하게, 찰떡으로 연기했다. 영화 또한 소설 못지않은 재미와 흡입력을 자랑하는데.. 2025년에 소설에 이어 두 영화를 연이어 감상하고 블로그 리뷰를 남겼다


각설하고..

현대문학 신간 <매스커레이드 라이프>는 작가 특유의 기발하고 치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가상의 작품이 훗날 실제 출간되는 바람을 갖게 하는, 매력적인 시리즈 최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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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통역사
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 푸른숲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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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랑그바드는 1980년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2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된 작가이자 번역가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초국가적 입양 시스템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2006년 시집 <덴마크인 홀게르 씨를 찾아라>로 덴마크 문학상 보딜-외르겐 몽크 크리스텐센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그 여자는 화가 난다> 등의 저서를 통해 입양 커뮤니티 안팎에서 활발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어왔다. 또한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덴마크어로 공공 번역하는 등 문학적 가교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신간 <나의 통역사>는 2024년 덴마크 몬타나 문학상과 프리즈마 문학상을 휩쓸며 북유럽 최고의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이 책은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저자와 그의 연인이자 한국계 덴마크인 통역사가 함께 한국의 친가족을 만나며 겪는 언어적 단절과 정서적 교감을 희곡 형식으로 담아낸 독창적인 책이다. 입양인이 겪는 근원적인 소외감과 핏줄로 얽힌 가족 간의 복잡한 미로를 통역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려낸다.


희곡의 무대 위에 올려진 기호와 디아스포라의 언어

책의 원제인 'TOLK'는 덴마크어로 통역사를 뜻하지만, 그 활자의 생김새는 묘하게도 한글의 자음과 모음(ㅜ, ㅇ, ㄴ, ㅈ)을 연상시킨다. 덴마크 독자들에게는 명료한 의미의 단어지만, 한글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파편화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기호처럼 다가온다. 표지에서부터 시작된 시각적 은유는 모국어를 잃어버린 작가의 처지를 고스란히 체현한다. 반면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통역사>는 이 건조한 원제에 '나의'라는 소유격을 더했다. 이는 통역사가 단순한 언어 변환기를 넘어, 단절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생명줄이자 가장 내밀한 연인이라는 절대적인 의존성을 부각한다. 원제가 객관적인 언어의 장벽을 보여준다면, 한국어 제목은 그 장벽을 넘고자 하는 주관적인 애착을 드러내는 셈이다. 일반적인 에세이나 소설의 서술 방식을 탈피하여 작가는 자신과 통역사, 그리고 친가족들의 대화를 대본처럼 나열한다. "나는 말한다", "내 통역사가 말한다", "큰언니가 말한다"로 이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독자를 관찰자, 옵저버?의 위치로 끌어당긴다. 언어를 잃어버린 화자의 말이 한국어로 적혀 있다는 모순은 역설적으로 그가 감내해야 했던 문화적, 역사적 상실의 크기를 시각화한다.


서울의 삼계탕집, 통역을 경유하는 감정의 온도

책에 담긴 시간과 공간의 궤적은 이들의 여정이 지닌 팍팍함을 보여준다. 2018년 서울의 어느 삼계탕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피자헛, 엔제리너스, 스타벅스, 호텔방 등 일상적이고 현대적인 공간들을 부유한다. 혈연이라는 강렬한 끌림으로 마주 앉았지만, 이들 사이에는 통역 없이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낮은 상 앞에 자리를 잡은 낯선 풍경 속에서 친어머니와 큰언니를 마주한 작가의 내면은 복잡하게 요동친다. 삼계탕을 먹었냐는 언니의 물음에 통역사를 거쳐 대답이 오가고, 출장 중이라 오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부재를 두고 어머니가 거짓말하시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대목은 피붙이라는 환상을 걷어낸 리얼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서술은 감상주의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언어의 지연을 통해 가족 간에 흐르는 미세한 긴장과 서툰 애정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발화되지 못한 비밀과 고백이 된 텍스트

대화의 이면에는 번역을 거치지 못한 숱한 말과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다. 작가는 끝없는 망설임 속에서 차마 한국의 혈육들에게 전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겉돈다. 연인이자 소통의 매개인 통역사와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둘째 언니와의 묘한 기류 속에서 통역사는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싫다면 먼저 레즈비언이라고 솔직하게 말해보는 것은 어떠냐며 고백을 제안한다. 허나 화자는 섣불리 진실을 꺼내지 못한 채 언니들이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문장들을 속으로 삼켜버린다. 비록 가족들이 넌지시 이들의 특별한 유대를 눈치챘을지언정, 마주 앉은 식탁 위에서 성 정체성은 끝내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나의 통역사>가 출간됨으로써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내밀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역설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떠나야 했던 모국, 디아스포라의 세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향과 연인의 존재가 낱낱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 문장 사이사이에 짙게 배어 있다. 발화되지 못한 채 삼켜진 비밀들은 활자화되는 순간 폭발력을 지닌 강렬한 고백으로 변모한다.


유가족 명단의 공백과 혈연의 환상

포착되는 서사의 뼈아픈 지점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허상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한 달이나 지나서야 접하고, 조카의 휴대전화에 담긴 장례식 녹화 영상을 통해서만 그 죽음을 간접적으로 목도한다. 무엇보다 유가족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혈연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부순다. 조카가 이모인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묻는 장면은 서글픈 단절을 방증한다. 친가족조차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해 그녀를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상황은 이들이 물리적으로는 마주 앉아 있으나 정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독한 소외감 속에서 텍스트는 단지 입양인의 슬픔에 머물지 않고,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고유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짚어낸다. 나아가 가족이라는 당위적인 굴레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을 조명하며, 소통이 불가능한 핏줄을 향해 그토록 끈질기게 손을 뻗는 행위의 의미를 독자에게 되묻는다.


침묵과 공백으로 쓰인 입양의 기록

작가는 애초에 덴마크어, 영어, 한국어라는 세 가지 언어로 이 글을 쓰려 했으나 결국 포기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두 개의 가족,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역사를 안고 있음에도 자신은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라는 자각이 이 독보적인 문학적 기법을 탄생시켰다. 텍스트 곳곳에 자리 잡은 의도적인 여백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쉼표가 아니라, 입양이라는 사건이 개인의 삶에 남긴 커다란 공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국계 덴마크인 여자친구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가장 신뢰하는 입의 역할을 하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화자에게는 모국어의 상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면 허공에 수영하는 시늉을 하거나, 몸짓으로 전복을 묘사하는 등 육체의 언어에 의존하며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푸른숲 신간 <나의 통역사>는 소설가 김혜진의 추천사처럼 잃어버린 언어의 자리를 디아스포라의 영토 안에서 채워나가는 서글프고 완강한 투쟁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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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
남은주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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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자가 길어 올린 연대의 기록

창비 신간, 남은주 지음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는 유럽의 심장 베를린의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르포르타주이자 고백록이다. 저자는 <한겨레>에서 18년간 몸담으며 <한겨레21> 문화팀장과 전국부 데스크를 역임하고, 2018년 제20회 5·18언론상을 수상한 뼈 굵은 언론인이었다. 특유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휴머니즘이 교차하는 문체로 정평이 난 그는 기득권의 언어를 버리고 타인의 고통 곁에 온전히 서기 위해 50세의 나이에 유력 일간지 데스크 자리를 박차고 201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7세 동급생들과 나란히 앉아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의 행보는 그 자체로 도전적이다. 낯선 독일어 단어인 '보호받음(Geborgenheit)'의 뉘앙스 앞에서 더듬거리는 '초급자'의 취약함을 기꺼이 감수했던 만학의 시간은 알량한 지적 권위를 벗어던지고 바닥에서부터 타인을 이해하려는 처절한 열정의 산물이다. 현실의 안락함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약자의 곁으로 걸어 들어가는 진정한 지식인의 용기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시대의 필독서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당신들은 왜 꼭 금요일 오후에, 내가 혼자 있을 때 오는 것일까."

책의 제목이 던지는 탄식은 벼랑 끝에 몰린 피난자와 소수자들에게 행정과 공공 시스템이 닫히는 금요일 밤이 얼마나 가혹한 시간인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난민 공동숙소의 비정규직 실습생이 되어 그 캄캄한 공백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과거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뼈아픈 반성 위에서 '환대 문화'를 자랑했던 독일이 어째서 다시 이주민을 배척하는 극우화 노선으로 회귀하고 있는지 그 이면을 해부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전범의 역사를 겪고도 독일 사회가 우경화되는 원인은 씁쓸하고 명확하다. 장기화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위기 앞에서 우보수 정치 세력은 대중의 불안을 이주민이라는 '타자'에게 전가하며 혐오를 정치적 동력으로 악용하고 있다. 2025년 3월 브란덴부르크 슈탄스도르프 지역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난민 숙소를 습격한 우익 청년들의 폭동이나, 2024년 봄부터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피난민 강제 송환 비행기를 띄우는 야만의 풍경은 이성적 통제력을 상실한 사회의 민낯을 생생히 고발한다.

기자의 예리한 촉과 복지사의 따뜻한 시선은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혐오를 촘촘히 교차시킨다. 1940년대 나치의 'T4 프로그램'으로 희생된 마르틴 바더, 시설에서 살해된 발달장애인 안나 등 '도덕적 결함'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살해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한다. 특히 책에 등장하는 라벤스브뤼크 여성 강제수용소의 '평화의 소녀상' 에피소드는 국가 폭력과 연대의 본질을 되묻는다. 2017년 5월, 이 수용소 추모관 입구에 길원옥 할머니를 기리는 작은 소녀 상이 놓였으나 일본의 거센 항의와 압력으로 결국 철거되어야만 했다. 나치 수용소 내에도 강제 성노동이 존재했다는 끔찍한 진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본질이 전시 여성 인권 유린이라는 맥락에서 결코 다르지 않음에도.. 가해의 역사를 은폐하려는 권력의 폭력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허나 2024년 라벤스브뤼크 묘지 추모식에서 주류 공식 행사에서조차 밀려난 소수자들이 한국의 '평화의 소녀상'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는 대목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해 타자화된 약자들이 어떻게 서로의 고통에 감응하고 연대하는지를 증명한다. 소녀상 철거라는 외교적 압력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응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분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배척당하는 난민과 소수자의 고통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국가 폭력에 맞서는 '세계 시민적 연대'라는 더 크고 단단한 방파제를 구축해야 한다.

독일의 이러한 퇴행은 인구 절벽과 다문화 사회 진입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마주한 한국 사회에 뼈아픈 타산지석이 된다. 경제적 불황을 핑계로 가장 취약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불안의 책임을 전가하고, 온오프라인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현상은 이미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우리가 독일, 유럽의 씁쓸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소수자를 시혜적 대상이나 통제하기 쉬운 값싼 노동력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으로 포섭하는 제도적, 사회적 안전망을 다져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안에 내재된 '정상성'의 기준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공 시스템이 멈추는 금요일 밤에도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시민 사회의 굳건한 연대 의식을 키워나가야만 한다.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는 각자도생의 건조한 세계에 던져진 뜨거운 숯덩이 같은 논픽션이다. 제도가 외면한 자리를 서로의 다정함으로 채워나가는 주변부 인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타인의 고통을 관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꺼이 금요일 밤 각자의 문을 열어 그들 곁에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었는가?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하면서 리얼한 이 기록은 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다정한 연대의 방향을 밝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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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여인의 선물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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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에 도착한 가장 관대한 은총

다산책방 신간, 미국 문학의 거장 데니스 존슨의 유작 <바다 여인의 선물 The Largesse of the Sea Maiden>은 간암 투병 중이던 작가가 임종 직전에 완성하여 2018년 사후 출간된 기념비적인 소설집이다. <스토너> 등을 우리말로 옮긴 김승욱 번역가의 세밀하고 유려한 번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 책은 출간 직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버락 오바마 선정 올해의 책, 뉴욕타임스 비평가 선정 최고의 책에 등극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생전 "그 무엇도 건드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라는 유언과 함께 출판사에 넘겨진 이 원고는 돈 드릴로 등 동료 작가들로부터 "단어 하나하나가 독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격하는 천재"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을 목전에 두고도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기이하고도 자비로운 '선물(Largesse)'의 의미를 서늘한 유머와 헤밍웨이에 비견될 정교한 문장으로 그려낸 압도적인 마스터피스다.


상실과 구원의 경계를 맴도는 5편의 이야기

1. 바다 여인의 선물 (The Largesse of the Sea Maiden)

  • 등장인물: 빌 휘트먼 (성공한 광고 카피라이터), 토니 (투신자살한 지인)

  • 샌디에이고에서 골프 리조트 브로슈어를 쓰며 살아가는 중년의 빌이 자신의 과거와 지인들의 죽음을 두서없이 회고한다. 1974년 132미터 높이의 다리에서 투신자살한 '토니'의 에피소드가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애도하기보다 글쓰기 소재를 메모하는 화자의 모습은 인간의 속물성과 서서히 퇴색해 가는 기억의 씁쓸함을 날카롭게 도려낸다.

2. 아이다호의 별빛 (The Starlight on Idaho)

  • 등장인물: 마크 카산드라 (캐스)

  • '스타라이트 재활 센터'에 수용된 중증 알코올 중독자 캐스가 의사를 넘어 사탄에게까지 마구잡이로 편지를 쓰는 소설이다. 38구경 권총에 갈비뼈를 맞았던 처참한 과거를 고백하며 "나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라고 뇌까리는 그의 독백에서.. 절망의 진흙탕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번뜩이는 기괴하고도 질긴 생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 교살자 밥 (Strangler Bob)

  • 등장인물: 딩크 (18세의 화자), 교살자 밥

  • 1970년대 초반, 18세 소년 딩크가 카운티 구치소에 수감되어 겪는 끔찍한 일주일을 다룬다. 아내를 죽인 '교살자 밥'은 10대 소년들에게 섬뜩한 예언을 남기고 이는 서서히 현실이 된다. 범죄와 마약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타락을 저자 특유의 건조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4. 무덤 위의 승리 (Triumph Over the Grave)

  • 등장인물: 나 (작가), 다시 밀러, 링크..

  • 1.8미터 길이의 날개를 가진 빨간 머리 독수리 떼가 시체를 파먹는 끔찍한 환영을 보는 화자, 폐암이 뇌로 전이되어 간호사에게 "한 달도 안 될 가능성이 높다"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 '다시'. 초반부터 로버트의 심장 발작을 알리는 여인 낸의 전화가 이후 이어질 죽음의 릴레이를 예고한다. 과연 무수히 늘어선 무덤과 비석들 위로 승리와 영광은 존재할 수 있을까? 폭우가 몰아치는 집 밖을 헤매다가 곧장 죽음으로 돌입하는 링크의 비장함, 몰핀을 거절하고 고통을 견디는 그의 짧고도 긴 투쟁을 지켜보는 화자의 모습이 치가 떨릴 정도로 생생하다. 머무르고 스치는 죽음의 양상을 지켜보며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어떨지 모른다"라고 적어 내린 화자의 독백은, 실제 병상에 있던 작가의 삶과 겹쳐지며 지독한 전율을 선사한다.

5. 도플갱어, 폴터가이스트 (Doppelgänger, Poltergeist)

  • 등장인물: 케빈 해링턴 (교수), 마커스 에이헌 (시인 제자)

  • 시인 마크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산된 쌍둥이 형제 '제시 가론'의 환생이 자신이라 믿으며 병적으로 집착하는 서사다. 특히 낡은 첼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명배우 피터 오툴과 우연히 갇혔던 순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뉴스가 들려오는 기묘한 병치는 개인의 강박과 시대의 비극을 엮어내는 거장의 기막힌 솜씨를 증명한다.


데니스 존슨: 미국 문학이 앓았던 지독하고 아름다운 열병

1949년 독일 뮌헨 출생. 2017년 간암으로 타계했다. 20대 시절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치명적인 방황을 겪었으나, 이 파괴적인 경험을 자양분 삼아 사회 변두리로 밀려난 약물 중독자와 부랑자들의 삶을 구원과 시적 은총의 무대로 뒤바꾸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확립했다. 단편소설집 <예수의 아들 Jesus' Son>로 천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베트남전을 다룬 <기차의 꿈 Tree of Smoke>으로 2007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존슨은 후배 작가들에게 "잉크가 마치 피처럼 소중한 것이니, 피로 쓰듯 글을 써라"라고 조언했으며, 그의 마지막 유작인 이 책은 그 철칙이 집대성된 위대한 문학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얼굴을 내리치는 진실, 핏빛 잉크로 써 내려간 마지막 눈짓

죽음을 앞둔 작가가 마지막으로 따라준, 지독하게 독하지만 영원히 미각을 맴도는 진한 버번위스키 한 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신 듯한 몽롱한 기분.. 데니스 존슨의 유작 <바다 여인의 선물>을 덮고 나면, 활자 위를 부유하던 죽음의 냄새와 생의 찬란함이 뒤섞여 기묘한 잔향을 남긴다. 간암으로 죽어가던 병상에서 그가 남긴 이 다섯 편의 소설은 유언장에 쓰인 회한의 고백이나 도덕적 반성문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라는 무자비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폭주 기관차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늙어감과 상실을 목격하고 버텨내는가를 담담히 증언하는 처연한 기록이다.


동료 작가의 평론처럼, 이 책 속의 단어 하나하나는 읽는 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격하며 이렇게 소리치는 듯하다. "자, 이게 전부야. 삶의 허무함, 공허함, 진실은 바로 이것이야!" 존슨의 세계는 흠결 많은 밑바닥 인생들과 서서히 망실되어 가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아이다호의 별빛〉의 중독자 캐스는 사탄에게 편지를 쓰며 절망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무덤 위의 승리〉의 다시 밀러는 1.8미터 날개를 펄럭이며 시체를 파먹는 붉은 머리 독수리 떼의 환각에 시달린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 친구의 모습은 임종을 턱밑에 둔 작가 자신의 육신과 오버랩되며 그 어떤 허구보다 섬뜩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허나 저자는 이들의 비루한 삶을 동정하거나 섣부른 구원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의 속물성과 파편화된 기억의 쓸쓸함을 담담히 바라볼 뿐이다. 놀라운 것은 그 건조한 시선의 끝에 어김없이 번뜩이는 '시적 은총'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죽은 쌍둥이 형제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도플갱어, 폴터가이스트〉의 마커스 에이헌을 통해 인간이 상실을 딛고 서기 위해 어떻게 각자의 환상을 기꺼이 끌어안는지를 묵묵히 보여준다.

"잉크가 너무 귀해서 한 글자도 낭비할 수 없는 것처럼, 핏방울로 글을 써라." 평생을 바쳐 지켰던 존슨의 이 고집스러운 원칙은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코 최후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죽은 사람이 아니지만... 여러분이 읽을 무렵에는 어떨지 모른다"


는 소설 속 문장은, 육체는 소멸할지언정 텍스트로 영원히 살아남아 독자와 마주하겠다는 저자의 오싹하고도 위대한 '무덤 위의 승리' 선언이다.


데니스 존슨은 책의 제목에 'Largesse(관대한 선물, 아낌없이 줌)'라는 단어를 새겨 넣었다.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형벌 같은 세계 속에서도 뜻밖에 마주치는 유머와 연민, 환상의 순간들이야말로 삶이 내어준 무상의 선물임을 역설한 것이다. 값싼 위로를 던지지 않고도 죽음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순도 높은 문장들로 생을 긍정하게 만드는 마법.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덤 너머에서 보내온 거장의 마지막 눈짓을 아프게.. 그러나 가장 뜨겁게 껴안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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