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경관 마르틴 베크 시리즈 4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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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뫼, 쿵스홀멘, 오덴가탄, 감라스탄, 유르고르스브론.. 강인한 억양에 긴 음절의 지명들이 이제는 친숙하다. 마르틴 베크 네 번째 시리즈에 이르자 자주 거론되는 도로와 지명들이 낯설지 않게, 위화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 형사들은 더욱 참혹한 살인 사건을 마주하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스톡홀름의 교외, 승객들을 태운 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인도를 침범한다. 버스 안 탑승객들은 무차별적인 기관총 세례를 받고 절명한 상태. 피해자들 중에는 권총을 소지한 현직 경찰도 포함되어 있는데..

비가 오는 야간에 그는 왜 무기를 소지한 채 버스에 탑승했을까? 살인자는 사이코 패스 광란의 총격 살해범인가. 아니면 치밀한 계획 하에 저지른 지능적인 살인범인가. 노상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한 달이 다 되도록 사건의 전말은 오리무중에 빠지는데, 과연 마르틴 베크와 콜베리, 멜란데르 등 스웨덴의 노련한 형사들은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이 셰발 & 페르 발뢰가 창조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네 번째 시리즈에 이르러 전 세계에 그 이름을 각인시킨다. 시리즈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흥행의 돌풍을 이어가며 미국 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 전을 반대하는 미국 대사관 앞 시위로 페이지를 여는 <웃는 경관>은 스웨덴에 불어닥친 사회적 혼란에 주목한다. 세계 대전을 경험한 세대와 전후 세대와의 갈등, 자국 내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와 복지 서비스 요구에 따른 혼돈에 빠진 당시 사회상을 행간에 잘 녹여냈다.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찰들의 집념과 열의, 점차 좁혀지는 체포망을 뚫고 은신하려는 범인과의 숨바꼭질이 막판까지 이어진다. 정밀한 정황 묘사와 곳곳에 복선을 숨긴 실감 나는 대화,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 덕분에 400페이지가 넘는, 긴 호흡의 소설이 단숨에 읽히는 마력을 지녔다. 과연 시리즈 대표작답게 막판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얽히고설킨 궁금증과 갈등이 일시에 해소되며, 마르틴 베크와 독자들을 안도와 희열 가득한 웃음으로 이끈다.



답답히 막힌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엔딩이 아닐 수 없다! 

마르틴 베크 다음 시리즈는 <사라진 소방차>이다.




#서평단 #웃는경관 #마르틴베크 #마르틴베크시리즈정주행멤버 #시리즈최고걸작 #경찰형사소설 #문학동네 #엘릭시르 #마이셰발 #페르발뢰 #김명남번역 #책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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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여우 꼬리 5 위풍당당 여우 꼬리 5
손원평 지음, 만물상 그림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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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콜라보, 손원평 X 만물상 작가의 어린이 동화 베스트셀러! <위풍당당 여우꼬리 5> 다섯 번째 시리즈가 출간되었어요.


구미호의 피를 물려받은 소녀, 손단미와 미래 초등학교 친구들이 펼치는 성장 모험 이야기. 다섯 번째 시리즈는 또 어떤 흥미진진 모험담이 펼쳐질지 너무 기대됩니다! 책 부제는 <별빛 가득 기적의 무대>랍니다.




<위풍당당 여우꼬리 5>는 이런 학부모님들께 추천드려요!

  • 아이들이 빠져들만한, 한 학기 한 권 읽기 추천도서를 찾고 있다.

  • 우리 아이에게 올바른 '감정' 사용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다!

  • 친구와의 우정과 협동심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아이가 고민이다!

  • 아이에게 '공연'의 참 재미와 진정한 '멋'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아이들도 이 책을 재미있어하지만, 제가 읽어도 완독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해요.

다섯 번째 여우꼬리와 시크릿 여우구슬을 획득한 손단미. 과연 꼬리와 구슬 아이템에는 어떤 신비한 능력이 숨겨져 있을까. 미래초 친구들과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가운데.. 좌충우돌 옥신각신 벌어지는 갈등을 해결하고 봉합하면서 해피한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 흐름이 몰입감 상당하네요. 손단미의 활약을 질투하고 레어템 구슬을 탐내는 빌런까지 등장하면서 아슬아슬 긴장감을 고조시켜요. 이거 이거, 아이들 보던 책을 제가 빼앗아 먼저 읽고 있네요.



아빠, 우리 책을 채가는 게 어디 있어? 어이없어! 한숨을 쉬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어쩌라고.. 엄마 아빠가 읽어도 무지 재미있는 걸 어쩌겠어요. 남녀노소를 뛰어넘은 판타스틱 한 성장 어드벤처 스토리 <위풍당당 여우꼬리 5> 꼭 읽어보시길 바라요!




#위풍당당여우꼬리 #위풍당당여우꼬리5 #여우꼬리시리즈 #신간추천리뷰 #어린이동화베스트셀러 #손원평x만물상 #판타스틱성장스토리 #구미호여우 #여우구슬 #별빛가득기적의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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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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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샘터 문예공모전 에세이 부문 대상을 받은 시각장애인 조승리 작가의 첫 단행본이 출간되었다.<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이 뇌리에 확 꽂힌다.



책날개 글에서 먼저 고백하기를, 저자의 엄마가 86년 아시안 게임을 시청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승리'라 지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삶이 승승장구하고 꽃길만 걸었으면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난에 찌들었고, 열다섯부터 시력을 잃어 '전맹'이라 부르는 시각장애인의 험난한 삶에 발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지랄맞은 일련의 이벤트로 점철되어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어려서 건강을 잃고 자신을 아끼던 외조부와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경제력을 상실한 채 자신에게 기대려고만 하고,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연인도 떠나는 등 최악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방에서 몰려드는 어둠이 그녀를 옥죈다. 그 안에 갇혀 날마다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떻든 삶을 살아내기 위해 일상에서 스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핀다. 마사지사로서 생계를 이어가며 고객으로 연을 맺는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이면의 명암을 기록한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장애인이라는 틀을 깨기 위해, 새로운 모험을 감행한다.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대만으로 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격한 춤사위인 탱고를 배우기 위해 학원 여러 곳을 수소문하기도 한다.



저자는 우여곡절이 많은 현재를 살면서 틈틈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건져내 글로 재구성한다. 자신을 스쳐간 수많은 이들.. 그중에 쌀쌀맞으면서 직설적인 엄마가 앞으로 나선다. 혹독한 가난으로 간난 아기였던 자신을 보육원에 유기하려던 엄마가 자신을 키우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갈등과 고투가 있었겠는가. 설상가상 그 딸이 어려서 시력을 상실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으리라. 온갖 지랄맞음이 쌓이고 퇴적되어 그들의 삶을 향한 의지는 여지없이 꺾여야겠지만, 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때로는 집이 떠나가라 말다툼하고 상대를 긁으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또한 그 순간을 즐겼다. 필요하다면 모녀간에 마주 앉아 맞담배를 피우면서, 담담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변치 않는 마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저자의 삶을 지켜내려는 투쟁심과 굳은 자존감, 일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포착하는, 감각적인 제3의 시선 그리고 거침없는 입담은 엄마로부터 내리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일생의 반려자였던 어머니를 영영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 또한 한없는 슬픔에 잠겼으리라. 허나 그녀는 알고 있다. 지랄맞음이 가득한,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히더라도 자신의 곁을 맴돌면서 밝히는 빛을 찾을 수만 있다면, 삶은 요절복통 축제라는 것을.. 비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반딧불이 무리를.. 그녀는 찾아내어 두 손에 담고 눈빛에 영원히 간직하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마음 깊이 열린 그 눈을 일컬어, 번득이는 혜안이라 부를지도 모르리라. 그녀는 누구보다 밝고 예민한, 제3의 시선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블라인드서평단 #조승리작가 #지랄맞음 #삶은축제 #달출판사 #신간추천리뷰 #시각장애인 #이병률시인추천 #그녀의삶은승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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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가에쓰 히로시 지음, 염은주 옮김, 기타무라 다이이치 감수 / 북멘토(도서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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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남극,

일본 남극 관측대 쇼와 기지 근처에서

가라후토견 한 마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이 일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_ 책 서두에서..



1911년 겨울,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그린란드 썰매 견을 끌고 남극점을 정복할 거라 하자, 경쟁자 영국의 해군 대령 로버트 스콧은 이 결정을 비웃었다. 스콧은 스노모빌과 조랑말을 주력으로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남극의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이들은 고장이 나거나 동사했다. 결국 충직하고 노련한 개들과 함께한 아문센은 무사히 귀국했지만, 스콧은 남극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인류는 아문센과 스콧이 남긴 교훈 대로 극지방 탐험을 위해 썰매 견들을 훈련시키고 원정대에 포함시켰다. 전후 일본 또한 남극 탐험을 위해 추위에 강한 '가라후토 견' 여럿을 1차 탐험대의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1958년, 미지의 동토 남극은 극한의 한파가 몰아쳤고, 빙토 곳곳에 크레바스와 크랙이 입을 벌린 위험 가득한 험지였다. 노령의 썰매 견 몇 마리가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두었고, 어떤 개는 짝짓기에 소외되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무리를 떠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가라후토 명견들은 얼음 땅 1600km를 내달릴 만큼 강인했고, 주인에게 의리를 지켰다. 개는 자신을 부리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들을 버리고 학대하며, 겪는 고통을 모른체한다.



1차 월동대는 엄혹한 추위에 밀려 철수하고, 쇼와 기지는 유령 기지로 변한다. 대원들을 태운 헬기가 눈바람을 일으키며 이륙할 때마다, 남겨진 개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발버둥 치고 울부짖는다. 빙판을 달리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자신들을 함께 데려가라고, 여기에 묶인 채로 버려두지 말라고,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개들의 몸부림과 비명은 빙판에 검은 점이 되어 이내 흩어진다. 혹한의 땅에 버려진 열다섯 마리의 개들. 그들은 목줄이 한껏 조여져 기둥에 묶인 채로 버려졌다. 그 후로 일 년이란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무르익지 않은 50년대였지만, 일본 각지에서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가까이서 개들을 돌보았던 '기타무라 다이이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3차 월동대원에 포함되어 다시 쇼와 기지를 밟게 된다.



놀랍게도 그는 살아남은 성견 두 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생존한 개들의 이름은 타로와 지로. 개들은 처음에는 경계하고 이빨을 드러냈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을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들었다. 자신들을 이 땅에 버리고 간, 동료들을 참혹한 아사의 지경으로 몰고 간 철천지원수임에도 환영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불시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이 마음 어딘가에 맺혀 있을 텐데도.. 개들은 인간에게 부드러운 혀를 내밀어 핥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타무라 다이이치는 그간의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서 눈 아래 파묻혀 동사한 개들의 사체를 거두어 수장한다. 그는 양심적인 인간이었고, 개들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한 정과 무리를 지키는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일찍이 깨달았다. 빙하 아래 얼어붙은 사체를 수장하면서, 그는 눈썰매를 끌던 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각자의 추억을 되새긴다. 사무친 한에 물 아래 가라앉지 못하고, 한참을 맴돌다가 천천히 잠수하는 개의 사체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눈물겹다.



이후는 노년의 기타무라 다이이치가 저자와 함께 살아남은 제3의 개의 행적을 쫓는 과정이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경험이 일천한 타로와 지로가 살아남기까지의 과정을 추리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들이 생존을 위한 먹이를 어떻게 구했을까. 혹시 제3의 개가 그들의 생존에 기여하지는 않았을까? 미수(88세)에 이른 기타무라가 행방불명된 개들을 떠올리면서, 마침내 제3의 개라 유력시 되는 이름을 불렀을 때.. 남극을 떠도는 수많은 견공들의 원혼은 일제히 하울링을 터뜨리고 꼬리털을 부풀렸으리라.


머나먼 극지에서 불귀의 신세가 된,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도 못하는 인간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그럼에도 한때 곁에 머물렀던 인간들의 향취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서평단 #그개의이름은아무도모른다 #북멘토 #가라후토견 #썰매견 #기타무라다이이치 #신간추천리뷰 #남극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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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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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3호는 갈수록 혼란해지는 세계 체제하에서 한반도가 어떻게 생존하고 활로를 뚫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올해 예정된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집권하리라는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천조국 달러와 IT, 막강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제국. 미국은 분열하고 있으며 카오스의 중심으로 돌입하는 중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국, 러시아와 미국의 최전방 전선에 위치한 한반도는 과연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혼종화되는 세계 체제에서 생존하고 진화하는 성공 서사를 써내릴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창작과 비평 측면에서 풍성한 콘텐츠를 담고 있다.

산문은 공선옥 작가의 <담양산보>, 김금희 작가가 연재하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 최종 편이 눈에 들어온다.

시편에서는 고명재 시인, 김정환 시인, 김이듬 시인 등 신구가 조화로운,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형태의 시가 돋보인다.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문학 비평도 뒤질 수 없다. 김해자 시집 <니들의 시간>을 조명하는, 유병록 시인의 친근한 글. 시인의 마음에 담긴 무수한 울음이 조각조각 이어져 천의무봉의 웃음에 이른다는, 세심하면서도 유쾌한 글을 놓칠 수 없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이하여 미지의 땅 유라시아에서 조우한 유홍준 작가를 추억하는 강인욱 교수의 글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사기를 이어가도록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창작과 비평>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릴 적 낡은 마호가니 책장 위 칸에 나란히 꽂힌, 누렇게 바랜 7~80년대 문예 잡지들. 아버지는 종종 마음이 심란할 때면 까치발로 서서는, 일렬로 늘어선 장서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무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습기를 머금어 쭈글한 표지를 쓰다듬는 것만으로, 정연한 목차를 훑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위안과 힘을 주는 그 시대 수많은 창작물과 평론들. 그 시절 <창작과 비평>은 무력통치와 외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줄기차게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가 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운동을 적극 응원했다.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은 그 시대 <창작과 비평>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고, 경직된 사회를 뒤흔드는 울림이 있다. 마흔이 넘은 나 또한 여러 권의 창작과 비평 지난 호를 서가 가장 높은 곳에 꽂아두고, 가끔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


현재 한반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짚어 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혜안이 눈부시다. 신인 작가를 발굴하여 지면에 등장시키는 문학 등용문 역할도 충실하다. 언젠가 내 글도 어느 최근호의 목차와 페이지 어딘가에 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까지 불쑥 움튼다.





90년대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서가를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두 발 모아 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누릿한 책등을 매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창작과 비평>은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굴곡진 시대에 지치고 좌절한 모든 이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담벼락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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