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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빨간 공
서은영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하나'라는 복슬강아지와 빨간 공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 공은 살아서 구르고 통통 튀는, 생기를 지닌 존재다. 심지어 하나와 장난을 칠 때는 짓궂은 표정으로 웃기까지 한다. 약 올리며 도망가는 공을 쫒느라 태양초가 가득 든 소쿠리를 뒤엎고, 양은 소반이 뒤집어지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덕분에 나이 든 강아지 하나는 심심할 틈이 없다. 아마도 하나는 둘도 없는 친구인 그 공에게 이름을 붙였을지 모르겠다. '레드'라 부르면 어울릴 듯싶다. 그들을 보살피는 할머니는 이 둘을 나무라거나 야단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가족들을 여의고 혼자 사는 듯한 할머니는 하나를 데리고 근처 바다로 산책을 가곤 한다. 빨간 목줄을 매고 따라 걷는 하나의 입에는 레드가 물려 있다. 물론 소중한 친구가 상처를 입지 않도록 턱에 힘을 약간 뺀 상태로 말이다.
해변으로 향하는 굽이굽이 골목길이 정겹다. 이웃집 빨랫줄에는 오들오들한 미역이 줄지어 널려 있다. 문 밖에는 주인 없는 세발자전거와 고무 다라이, 어망이 나동그라져 있다. 대문짝을 아예 떼어낸 사이로 앞마당에서 뛰노는 아기 고양이가 눈에 띈다. 모두 연한 파스텔 톤의 따스한 색감으로 안온한 느낌을 전한다.
이들을 지나치자 곧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우뚝 솟은 비죽한 등대와 외딴섬, 바다 위를 활강하는 갈매기도 보인다. 목줄에서 풀려난 하나는 모래사장에서 레드를 바닥에 놓아준다. 할머니는 레드를 하나에게 던져 준다. 몇 번 주거니 물거니, 일부러 놓쳐서는 앞발로 몰고 다니다가 그만 레드는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해안에서 밀려난 레드는 점점 바다 깊은 곳으로 쓸려간다. 하나는 쉴 새 없이 네 발을 놀려 그를 뒤쫓는다.
너와는 절대 떨어질 수 없어. 내가 구해줄게, 왈왈!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어찌 보면 레드는 파도에 무력하게 휩쓸리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어딘가로 나아가는 듯하다. 하나야, 넌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판타스틱한 낙원으로 인도할 테니.. 바닷물에 반쯤 잠겨 싱긋 웃는 레드 위에 말풍선을 그린다면 대략 이런 대사가 쓰이지 않을는지.
그들 앞에 난데없이 섬이 나타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오직 하나와 레드만을 위한 파라다이스. 알록달록한 가지각색의 공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빈틈없이 가득 차 있는 무인도라니.. 세상의 모든 주인 잃은 미아 신세의 공들이 여기로 흘러든 걸까. 레드는 수많은 친구들과 조우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는지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는다. 하나 또한 방방 튀어 오르고 구르며 폭신한 공 아일랜드 위를 뛰어다닌다. 몇몇 갈매기들도 난입하여 어울린다. 흡사 섬 전체가 거대하면서 소프트한 공 매트리스 아니면 쿠션 좋은 트램펄린과 같다. 정신없이 내달리다 바닥에 박힌 낡은 축구공에 발이 걸린 하나, 균형을 잃고 높이 솟구친다. 곧장 바닥에 떨어진 하나는 다시금 위로 솟아올랐다. 물컹한 공으로 빽빽한 섬은 하나를 떠받들어 저 하늘로 높이 쏘아 올린다. 레드는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점프하고 데구르 구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놀던 하나는 석양이 물드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입 안 가득 탐나는 공을 문 채로. 허나 레드는 그 안에 없었다. 레드는 섬에 남기를 원했다. 자신이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영영 볼 수 없는 레드와 할머니. 홀로 남은 할머니와 레드. 컷으로 분할된 회상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 겨울 눈밭에서 뛰노는 셋의 풍경. 다채로운 색으로 물든 노을 진 바다 저 편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레드, 하나의 뒷모습이 비치는 순간, 허구의 섬은 저물고 실제하는 해변이 떠오른다.
하나가 입에 문 공들을 내려놓고 레드를 택하는 순간, 다가온 할머니는 그에게 목줄을 채웠다. 그 섬은 무의미한 공상, 헛된 백일몽이 아니었다. 돌아온 현실의 시간은 저만치 흘러갔으니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어둑한 골목을 거슬러 돌아가는 길은 풍경이 살짝 변했다. 전봇대 아래 자전거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빨랫줄이 늘어지도록 널린 미역들은 걷은지 오래다. 담벼락 위에 웅크린 야옹이는 잠을 청하고 있다. 할머니와 하나는 내일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시간에 같은 길을 따라 바다로 향할 것이다. 하나 입에 물린 레드 또한 통통대는 웃음을 지으며 동행하리라. 날씨가 화창하다면 운때가 맞는다면, 어쩌면 그들은 다시 그 섬을 찾을지 모르겠다. 앞장선 레드가 길을 인도하고 하나 곁에는 또 다른 견공들이 함께하리라. 색색의 공으로 넘실대는 섬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뭉툭한 꼬리를 흔든다.
그렇게 그들은 상상의 바다를 건너 영원의 섬에 다다른다. 할머니는 실재하는 해변에 서서 하나와 레드가 돌아오길 기다릴 것이다. 해가 저물기 전까지 어떻든 그 둘은 돌아오리라. 셋은 그렇게 함께 늙어가고 낡아간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