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 2025년 전국 기적의 도서관 선정도서 한울림 꼬마별 그림책
김병하 지음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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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씨 아저씨는 텃밭을 가꾼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신고 휘파람을 불며 밭으로 향한다.

줄과 줄 사이 돔북한 밭고랑에 갖가지 채소 씨앗과 모종을 심고 아낌없이 물을 준다.

고개를 한껏 낮추어 연초록 새싹이 움트는 걸 바라본다. 연한 잎만 골라 파먹는 애벌레를 나무저로 일일이 잡아준다. 하루가 다르게 웃자라는 고추랑 토마토, 수세미, 오이의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주고, 버팀목을 세워 지지한다. 빽빽한 잎 따 주고, 촘촘한 열매 솎아 준다. 밑거름도 주며 가꾸느라 하루하루 정신없이 텃밭만 보고 오가던 김씨 아저씨. 그러다가 자신의 발밑에 깔린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을 듣고서야 바쁜 걸음을 멈추었다. 막 피려는 꽃망울이 뭉개진 민들레 한 줄기가 겨우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아.. 니가.. 거기 있었구나..


어찌 그동안 그의 눈에 밟히지 않았을까. 민들레는 항상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운 나쁘게도 그의 집에서 텃밭으로 향하는 길목에 민들레는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공들인 텃밭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무심한 발굽에 끌리고 짓밟혔다. 끝내 힘겹게 뻗은 꽃대가 꺾이는 수난을 당했다. 그제야 김씨 아저씨는 주위를 돌아본다. 자신의 보살핌 아래 온갖 채소들이 생기를 내뿜는 울 안이 아닌, 애초부터 그의 곁을 지켰지만 철저히 소외된 울타리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외따로 고립된 어느 미미한 존재 앞에 걸음을 멈추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염려한다. 수없이 눈먼 발길에 차이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곁을 지킨 민들레를 다독이고 돌 울타리를 둘러주는 그의 손길이 사려 깊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리던 그의 시선은 사방을 주의 깊게 살필 테고, 발걸음은 신중해질 것이다.


-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렸을 내 발에 밟혀, 상처 입고 아파했을 이가 어쩌면 민들레뿐만은 아니겠구나!


도심의 거리는 두 눈을 가린 성난 경주마처럼,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는 자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되는 이는 적으로 간주하고 어깨로 밀치고 그대로 깔아뭉갤 광인들이 활보한다. 시속 140 키로, 160 키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추월하는 차량의 행렬들. 매일 사망자가 발생하고 부상자가 쏟아진다. 더 이상은 힘들다. 허용 가능한 한계치를 넘어선 지 오래다. 모두가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꼴이다. 가파른 절벽 끝에 몰려 우격다짐을 하고 아득바득 다투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간 소외된 사각지대를 돌아보고 곁을 살필 때가 되었다. 벌건 핏줄이 선 두 눈을 감아보자. 가슴을 열어 큰 숨을 들이 내쉬고 심호흡을 하자. 잠시 후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라. 무심히 지나치던 보행로 곳곳에는, 구둣발에 짓밟히면서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미물들이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할지도 모른다. 가속 페달을 깊이 누른 발을 떼어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하자. 비상등을 켜고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워 보라. 불투명한 차창을 내리고 길가를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눈에 띌 것이다.

하물며 민들레와 잡초뿐이겠는가. 그리 매정하게 대하고 상처를 입혔음에도 자신의 곁을 지키고, 시선을 돌리지 않는 어떤 이가 눈에 든다면.. 조심스레 다가가 온기 어린 말을 건네 보자. 다시는 그를 짓밟지 않도록 낮은 울타리라도 쳐주고 관심을 쏟자. 그래야 각박한 세상 살이 그나마 따뜻해진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지켜줄 수 있다. 거친 외풍과 내부의 흔들림에도 끄떡없이,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모두의 터전을 지킬 수 있다.



난 김병하 작가가 쓰고 그린 <미안해>를 거듭 읽었다. 텃밭에서 밀려나 목이 꺾인 민들레 한 가닥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전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끝없는 투쟁심과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성과 주의에 떠밀려, 사방으로 아래로 내뱉은 모진 말들. 속수무책으로 짓밟힌 그들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체념한 채로 하루를 버틸까. 아니면 발악하고 앙갚음하는 심정으로 곁의 다른 이를 헐뜯고 상처 주며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날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도리어 상처를 입히고는 어떠한 사과와 해명도 없이..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어색한 웃음으로 그들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억지 봉합하려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난 아이들 곁에 앉아 이 책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김씨 아저씨의 작업실 안에 걸린 고라니 가족들의 스케치가 정겹다. 아이들이 어릴 적, 종종 읽어주었던 <고라니 텃밭>과 <강아지와 염소 새끼>가 떠오른다. 모두 김병하 작가의 세심한 손길이 묻은 작품들이다. 여백이 많은 수채풍의 그림체는 해맑고 가벼워 보인다. 허나 작가의 오랜 숙고 끝에 얻은, 묵직한 깨달음이 그 안에 담겨 있기에 우리는 마냥 웃을 수는 없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밖에 없다. 긴 시간 그 민들레를 바라보며 보살피다가 그림책 말미에 띄운 작가의 각성이 허공을 가르는 죽비로 다가온다. 울림이 큰 일격을 맞은 뻣뻣한 내 목덜미 선뜻하다. 뒷목이 얼얼하다.

마지막 잡석으로 원을 두른, 자그마한 민들레의 실제 사진과 작가가 전하는 말까지 읽고는 책을 덮었다. 양 옆에 앉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둥글고 도톰하고 매끈하던 아이들의 정수리와 뒤통수가 이제는 다소 굴곡지고 오목한 것처럼 느껴진다. 난 아깃적 배냇머리의 오밀조밀한, 신이 손수 빚은 듯한 태초의 그 느낌이 되살아날 것처럼.. 자꾸만 아이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얼마 후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을 떠났다.

난 눈을 감고 책의 앞표지를 매만진다.

지은이의 시선이 머무르는, 귀퉁이 민들레 움튼 자리가 유난히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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