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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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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리숴의 <상나라 정벌>. 원전 제목은 <전상翦商>, 상나라를 반으로 잘라 해부하다/파헤치다란 의미. 부제는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다.

저자는 프롤로그부터 상나라 곳곳의 유적지, 무덤, 지하 갱에 켜켜이 묻힌 유골 더미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당시 상황을 재연한다.



"1차로 19명을 죽였는데, 머리와 몸뚱이가 온전한 것은 2구뿐이고 정강이나 발목이 잘린 것이 5구, 머리뼈가 있는 것이 10개, 상악골 하나, 오른쪽 넓적다리 하나가 있다. 분별이 가능한 젊은 남자와 여자가 3명이고, 성년 남자가 2명, 아동이 4명, 영아가 2명이다. 4명의 아동은 모두 시신이 불완전한데, 하반신이 없다.. 2명의 영아는 모두 머리 뼈만 남아 있다."_ 22~23p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신이 절단된 상태로, 하늘에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발견된 망자들. 저자는 이들이 중국 교대 훠화 문명을 기반으로 한 상나라의 순장과 인신 공양 제사 풍습을 증언하는 사료라고 서술한다. 상나라는 왕국의 풍요와 평안을 위해 노예와 평민, 귀족을 불문하고 살아 있는 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니발리즘 문화가 존재했다. 망자와 함께 일부 가족과 노예 등이 갱저에 묻히는 순장 풍습과 함께 인신공양은 고대 신관 문화를 대표하는 관례였으니.. 신성하고 어린 자의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꺼내 그 형태로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가 하면, 제물의 꿈틀대는 살점을 육장에 담그거나 무솥에 삶아서는 액을 물리치기 위해 섭식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육신의 일부가 훼손된 자들은 숨이 떨어질 때까지 고통과 비명에 시달리며 다져진 사면의 지하 갱에 버려졌으니, 그 집단 상흔이 현재 중국 은허 지역의 제사갱 등에 남아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평생을 바쳐 탐구한 고고학 유물과 갑골문자,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지하 깊이 파묻힌 상고 역사와 인물들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상나라 주왕에 이르러 무차별적인 인명 살해의 마수는 귀족층에까지 뻗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주지육림, 포락지형의 고사를 기억하는가? 도처에 울음이 퍼지는 가운데, 상나라의 속국이 된 주나라의 문왕에게 비극이 덮친다. 문왕 희창의 장자 백읍고는 포로 신세가 된 아버지의 석방을 탄원하다가 되려 제물이 되어 처형되고 만다. 왕명에 따라 친자의 피가 뚝뚝 흐르는 육장을 삼키는 아버지의 표정이 비탄에 잠긴다. 주나라 문왕은 복수를 다짐하며 토굴에 은신한다. 상나라가 숭상하는 검은 새를 저주하며 건괘를 조합하여 두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기묘한 은유가 넘치는 글을 엮었으니 저자는 이를 <역경>이라 주장한다. 역경은 주 문왕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친족의 복수와 함께 상나라의 몰락을 기원하고, 주나라의 길복 역전을 염원하는 비밀스러운 점괘서였다는 것이다.



결국 주나라 무왕에 이르러 결성된 동맹군은 목야 전투를 통해 상나라의 주력 방어군을 섬멸한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물 건너는 이의 정강이를 도륙하던 폭군 주왕은 분신하여 자결했다. 친형 백읍고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무왕은 복수를 위해 주왕을 재차 참수하고, 상 왕족과 측근들을 모두 인신 공양 풍습대로 천천히 살해하며 카니발의 밤을 즐겼다. 친족의 인신공양 참극과 통렬한 복수, 후대의 금의환향에 이르는 고대 서사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이후 이어지는 주공의 인본 정치를 숭상하는 섭정과 상나라 역사 지우기, 상나라의 후예였던 공자의 역경에 대한 촌평과 어두운 선대 역사에 대한 하소연, 육경 편집 에피소드까지.. 저자 리숴의 기존 고대 역사관을 비틀고 깨부수는 혜안과 논리적이면서 풍부한 서사 능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 책으로 인해 중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학계 인식이 바뀌었고, 석기시대부터 시작된 하/상/주나라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세간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니.. 기회가 되면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1000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터운 역사서지만, 관련된 유적 사진과 스케치, 지하갱 도면이 상세하여 큰 막힘없이 완독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두 나라의 일족 살해 & 복수 활극 서사가 몰입감이 상당하여 마치 대하 역사 소설을 읽는 듯하다. 중국 출간 1년 만에 40만 부를 돌파하면서 경직된 중국 상고사 학계에 날선 도끼를 내리친 <상나라 정벌>이 국내에 상륙했다. 이제 당신이 육중한 청동 도끼를 받아들어 날과 자루에 새긴 갑골문을 더듬어 훑을 차례다. 석화된 검은 새가 날갯짓을 하고, 지하에 묻힌 억울한 망자들이 깨어나 손짓을 한다. 우리는 그들의 한 맺힌 사연과 참회록을 밤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서평단 #상나라정벌 #리숴 #글항아리 #문학동네 #인신공양제사 #주지육림 #주왕문왕 #주공공자 #고고학역사 #신간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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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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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아지면 서로에게 오줌을 싸고 뭐 그러는 거야. 따로따로 넣은 우리가 열 개는 있지 않으면 저놈들은 싸우기 시작해. 그리고 수컷이 다른 수컷을 거세하지. 그런다니까. 고환을 물어뜯어버려. 그러면 피투성이 난장판이 되는 거야. 그래서 저것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잡아 죽여야 해. 안 그러면 난리가 나.

_ 1989년, 미시간 주 플린트 주민 론다 브리턴..





테스 건티의 데뷔작 <우주의 알>. 배경은 인디애나 주의 몰락한 도시 바카베일. 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미국 디트로이트와 플린트 시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도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토끼장'을 빼닮은 어느 빈민가 아파트 라라피니에르. 우리는 이곳을 슬럼가, 닭장이라 비하하여 말할 것이다. 서두부터 18세 소녀 블랜딘 왓킨슨의 영혼은 육체에서 이탈한다. 그녀가 신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믿음 대로 심장의 황홀경, 천사의 화살 공격이 벌어지나 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녀의 온몸을 뒤덮고 있다. 이후 등장할 자동차 공장, 폭스콘의 노동 착취 현장, 솜꼬리 토끼의 행렬, 어머니가 삼키는 옥시코돈 등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저자는 우리를 만화경의 세계로 데려간다, 다채롭고도 암울한 판타스틱한 이미지들의 축제..



야생적인 날 것의 요지경이 펼쳐진다. 뒤죽박죽 얽히고 설긴 캐릭터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들. 만화경으로 바라보는 토끼장의 내부는 혼란하고 기이하기만 하다. 생쥐들이 천장과 복도를 활보하고, 에어컨과 외창이 없는 암울한 실내. 그 안에 서식하는 인물들은 비현실적이면서 비물질적인 상태로, 허공을 떠다니는 미세먼지보다 작은 무인 것처럼 점멸하다가 사라진다. 동물들을 학대하면서 쾌락을 찾고 그 영상을 SNS에 올리는 10대 소년 잭. 멸종 위기의 나무 늘보를 위해 자신의 유골을 기증하겠다는 부고를 직접 작성한 어느 여배우는 죽음과 나란히 셀카를 찍었다고 증언한다. 그녀의 외아들 모지스는 고해성사를 통해 부재하는 어머니의 위선과 거짓된 삶을 고발하려 하지만 고백은 자꾸만 행간 밖으로 뛰쳐나가 진심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만화경 렌즈에 비치는 토끼장의 전경과 내부가 달라지는 기분에 도취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랜덤 한 서사가 우리의 식상하고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프리즘처럼 굴절시킨다. 가련한 주인공 티퍼니는 40 대의 음악 선생 제임스와 관계를 가지며 진정한 신을 현현했다는 옛 성녀의 이름을 본떠 '블랜딘'이라 개명한다. 허나 제임스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의 육체와 순수한 영혼까지 탐하는 비열한 쓰레기일 뿐이다. 블랜딘은 여전히 두꺼운 알 껍질을 깨지 못한 채, 갈수록 토끼장 안으로 매몰되고 감금되고 있다. 서로의 고환을 핥고 물어뜯어 거세하는 야생의 철장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쯤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일까. 그녀는 과연 불뚝이는 심장을 꿰뚫는 황금 화살의 세례로 고통과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블랜딘은 악동 패거리에 둘러싸여 죽음에 내몰린 염소를 대신해 칼에 찔리고, 자신의 붉은 피를 바치고서야 초월적인 존재를 현현하게 된다. 쩌억! 오래도록 깨지지 않고 틈이 안 보이던, 질기고 강건한 태초의 알 껍질 표면에 금이 가는 소리. 그 안에서 황홀경에 빠진 심장의 박동이 두근대고, 먼 우주에서 천사가 쏘아 올린 화살이 알의 핵심을 노리며 광속으로 날아온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환상으로 가득한 토끼장의 세계가 흔들리고 무너지려 한다. 짧은 엔딩 크레디트가 위로 흐르고 암전 되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C4 호에 누워 자신의 육체를 내리보는 블랜딘의 영혼을 마주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되돌이표처럼 무한 생성되고 증식하는 황홀경에 빠진 만화경의 요지경 세계. 희망적인 후속편과 기적적인 환생을 약속하는 쿠키 영상이 재생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기꺼이 그 안에 다시 빠져들어 심취할 수 있다.



내 말 들어. 진짜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이 뒤로는 아무것도 없어. 알겠어? 그러니까 3막이 있는 것처럼 살지 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다음 쿠키 영상도 없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_<우주의 알>_327p



기묘한 만화경을 뒤흔들고 내던져도 그 안에 담긴 환상적인 이미지는 무너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갖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우리를 둘러싼 각종 SNS에서 1 ms도 쉬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자아도취에 빠진 과 노출/댄스 & 펫 & 맛도리 이미지와 영상을 토해내는 것처럼.. 우주의 알에 둘러싸인 환상은 멈추지 않는 심장처럼, 엔딩 없는 수다를 떨고 있다. 우리는 불규칙하고 엇나가는 박동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서평단 #해외문학 #시리즈 #환상하는여자들 #우주의알 #테스건티 #은행나무 #환상독서단 #신작추천리뷰 #전미도서상 #심장황홀경 #토끼장 #네버엔딩판타스틱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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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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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든 린덴나무, 젊은 나이에 시들었다네.

마른 나뭇잎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지. 내 머리에 달렸던 것들을..

_<생명과 푸르름을 주오>_구스타프 프뢰딩, 스웨덴 서정 시인_334p



마르틴 베크 세 번째 시리즈. 무대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이다. 스칸디나비아 최대 도시답게 횡행하는 범죄는 잔혹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원에서 노약자들을 노린 흉악 범죄가 발생한다. 노인들이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한 후 소지물을 절도 당하고, 무방비 상태의 아동을 노린 성폭행 교살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대도시는 두려움에 떨고 경찰 치안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친다. 시민들이 자경단을 꾸려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찰을 하다가 잠복 형사를 구타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터진다. 연쇄적으로 터지는 강력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연일 밤을 새우는 형사와 경찰들은 피로에 찌들어 무기력한 모습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 콜베리, 군발드 라르손, 멜란데르는 별개의 건으로 보이는 강도/강간 사건의 용의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지 오래다. 악인은 다른 악인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고 했던가? 노상강도 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검거하여 그를 통해 아동 강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보려 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허나 이 사건들의 시작과 끝을 서술한 책을 펼쳐본 우리는 알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사건 발생 전, 어느 골함석판 발코니에 서성이는 사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독자들은 그가 아동 강간 사건의 피의자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다.



유능한 형사들은 헛물만 켜고 있고, 사건의 핵심에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범인을 놓칠 수밖에 없어. 또 다른 아동 피해자가 생길지도 몰라. 스톡홀름의 모든 시민들과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애정 하는 독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는 가운데.. 형사들은 드디어 사건을 해결하는 단초를 움켜쥐고는 범인의 은신처에 접근한다. 최초에 수상한 용의자의 신원을 제보한 어느 부인을 찾는 과정은 지난하기 그지없다. 막강 논리력에 피지컬을 겸비한 베테랑 형사의 종횡무진 활약을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히어로물은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찾아야 한다. 어느 이름 모를 말단 경찰이 순찰 도중 들른 빵집에서 주위를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인 덕분에, 발코니에 선 남자를 쌍안경으로 스토킹 한 부인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었다.



삼엄한 봉쇄를 벗어나 으슥한 변두리 지역에서 다음 피해자를 물색하던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 또한 우연함을 가장한 순찰 경찰의 노상 방뇨 덕분이었다. 일종의 횡재 아니면 운명적 연행/체포라고나 할까. 천재적인 히어로 형사의 활약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천인공노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불철주야 반복 업무를 하는, 평범한 경관들의 협력과 포기를 모르는 의지 덕분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현장에서 발로 뛰고 음지를 살피는 그들 덕분에 사건을 해결하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이 셰발 & 페르 발뢰가 그리는 경찰들은 그렇게 서로 빚을 지고 신세를 지는 가운데,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하며 대도시의 안녕을 책임지고 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위험 지역을 순찰하고 치안을 책임지는 모든 경찰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범죄 소설 <발코니에 선 남자>를 읽으며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다.





#발코니에선남자 #마르틴베크 #마르틴베크시리즈정주행멤버 #경찰형사소설 #문학동네 #엘릭시르 #마이셰발 #페르발뢰 #김명남번역 #서평단 #책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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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 유쾌발랄 사기꾼의 복권 당첨금 수령 프로젝트
마리사 스태플리 지음, 박아람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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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기만과 사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기만과 사기를 경계하느라 세상의 미덕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이상을 위해 싸우고 있고

선한 용기와 영웅적 행위가 곳곳에 가득하다._맥스 어만_<간절히 열망하는 것들> 중..




1982년 뉴욕시, 어느 수녀원 앞에 요란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삶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 버리고 간 아기일까. 주위를 지나던 사기꾼 '존 암스트롱'은 생면부지의 아기를 데려다 키우기로 작정하고는, 밖으로 나온 어느 수녀의 금목걸이를 협잡질을 통해 적선을 받는다. 그의 혀는 뱀처럼 거짓으로 가득하고 진실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아기에게 '럭키 암스트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사기 수법을 가르치며 미국 전역을 방랑하기 시작한다.


'럭키'는 어릴 적부터 정체성이 흔들리고 혼란이 가득하다. 난 대체 누구일까. 엄마는 날 홀로 두고 어디 있는 거야? 난 왜 수시로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감춰야 하지? 아버지 존은 두루뭉술한 거짓으로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고 진실을 외면하려 한다. 뚜렷한 정착지 없이 이곳저곳 발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부유하는 삶. 자연스레 럭키는 외톨이가 되고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 아버지 곁에서 사기 행각에 동조한다. 급기야는 그 안에서 자신을 감추면서 남을 기만하고 속이는 쾌감에 탐닉하게 된다. 하지만 럭키는 혼탁한 수면 아래 잠겨 숨이 막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감옥에 갇힌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남자 친구 케리를 만나 독립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굴곡진 생은 여전히 험난했고 긴 터널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케리는 아버지와 같은 류의 사기꾼이었고, 결국 그녀를 등치고 야반도주하고 만다. 설상가상, 사기 범죄로 지명 수배범으로 몰린 럭키는 좌절하지 않고 턱 밑까지 차오르는 진흙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한다.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서일까. 아니면 럭키라는 이름대로 무지갯빛 천운이 그녀를 휘감은 걸까. 복권 당첨으로 거액의 상금을 거머쥐게 된 럭키는 자신의 생모의 행방을 찾고, 무사히 거금을 수령하기 위해 좌충우돌, 로드 트립을 감행하게 된다.


책은 럭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저자 마리사 스태플리는 아버지 존을 통해 100% 칠흑 같은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사기에 농간을 즐기는 잡범이지만, 생판 모르는 딸을 위해 평생 헌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졸부의 돈을 교묘히 가로채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것이 유일한 재능인지라, 럭키에게 그 재능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럭키를 버리거나 학대하지 않았고, 사기꾼으로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성장시켰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용한 대로 기만과 사기에 물든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숨은 온정과 미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수녀원에서 맺어진 부녀의 연은 우여곡절 끝에 질기게 이어졌다. 수감된 아버지와 달리 럭키는 파국을 맞지 않고 진탕에서 벗어나 낙원에 발을 들이는 데 성공했다.


우주의 모든 기운이 럭키에게 복을 몰아주어 그녀의 험난한 방랑 여행은 해피 엔딩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녀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버지가 명명한 이름과 전수받은 달란트에 따라 사기와 협잡을 계속 일삼을지.. 생모의 이름을 따라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따를지는 오로지 그녀의 선택에 좌우되리라.



"모두가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두 혼자가 될 거예요."



럭키가 읊조리는 저 깨달음과 신조를 잊지 않는 한, 그녀는 삶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올바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리라. 

그녀의 선택에 신중함과 현명함이 깃들기를.. 그 앞길에 벅찬 행운이 동행하기를..



#서평단 #럭키 #마리사스태플리 #문학수첩 #신간추천리뷰 #복권당첨 #사기협잡 #부녀인연

#온정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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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플레이어 투 -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숨겨진 일곱 개의 조각을 찾아서 레디 플레이어
어니스트 클라인 지음, 전정순 옮김 / 에이콘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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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국내 출간된 <레디 플레이어 원>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저자 '어니스트 클라인'은 메타버스 & 가상현실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메시아로 거듭났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덧입혀 2018년 동명의 영화를 개봉했다. '오아시스'라는 가상 세계에 숨겨진 세 개의 열쇠를 찾는 모험을 그린 영화는 원작을 스크린 상에 훌륭히 재현했다. 전 세계의 대중문화 오타쿠와 메타 버스 신봉자들은 원작에 이어 영화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대중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며 N 차 관람이 늘어나고 도서 판매량이 늘어날 즈음, 나 또한 서울 어느 극장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을 감상했다. 빈민가의 10대 소년이 가상 현실에 우연히 뛰어들어 퀘스트를 완수하며 성장한다는 스토리는 장대한 스페이스 어드벤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극적인 몰입감과 재미를 선사한다. 막판 거대한 건담과 메카 고질라와의 한 판 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영화 감상 후 접한 원작은 500페이지가 넘는 텍스트를 통해 가상세계를 세밀히 구축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우정과 사랑,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저자는 평생토록 덕질을 통해 갈고닦은, 책과 영화/음악 등에 대한 고급 & 전문 지식을 사이사이 배치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도한다. 독자들은 그가 숨겨 놓은 복선과 힌트를 해독하고 풀이하며, 주인공과 함께 미션을 완수하고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쾌감을 누릴 수 있다.


몇 년이 흐른 후, 저자는 자신이 창조한 오아시스라는 세계가 과거의 유산에 묻혀 망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한 덕질을 통해 습득하고 켜켜이 누적된, 오마주를 바쳐야 마땅한 무궁무진한 대중문화판이 그를 키보드 앞에 다시 앉혔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오엔아이'라는 헤드기어를 통해 인간의 뇌와 정신까지 컨트롤하는, 기존의 오아시스를 급진적으로 확장시키고 진일보시키는 변혁을 꿈꾸었다. 정점에 오른 주인공 '웨이드 와츠'는 오아시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지만, 디지털 아바타 빌런의 출현과 함께 그의 아성은 삽시에 무너진다.


세이렌의 영혼을 깨우고 최강의 가상 빌런을 격파하기 위해 일곱 개의 조각을 찾아야 하는, 흥미진진한 퀘스트가 펼쳐진다. 흘러간 대중문화에 경배하고, 미래 세계를 촘촘히 건설하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특기이자 장기는 신작 <레디 플레이어 투>를 통해 보다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일련의 퀘스트를 통해 세가에서 출시된, 시대를 앞선 여성 닌자 아케이드 게임과 80년 대 코미디 영화의 대부 '존 휴스' 감독을 소환한다.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팝 장르를 확장하고, 파격적인 캐릭터와 다양한 성 역할을 시도한 '프린스'에 오마주를 바친다.


마지막 퀘스트는 판타지의 영원한 대부, J.R.R 톨킨이 창조한 '실마릴리온'의 세계에서 궁극의 대적 '모르고스'의 왕관을 훔쳐야 한다. 저자는 마르지 않는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오아시스'를 탐험하는 이들의 좌충우돌, 혼란스러운 여정을 매끄럽게 촘촘히 구현했다. 텍스트로 차곡차곡 빚어지고 쌓아 올려진, 가상 우주에 떠다니는 온갖 피조물들은 손에 잡힐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실감 나고 생생하다. 어디 그뿐이랴! 저자는 머지않은 시기에 도래할 가상 세계에 대한 위험 요소를 포착하고, 현실 세계에 미칠 영향을 예견하여 소설의 주요 서사로 다루는데 성공했다. 리얼 월드와 가상 세계의 대립, 인공 지능/아바타의 체제 이탈과 반란, 마인드 백업과 이를 통한 디지털 환생과 멀티 유니버스 탐험까지.. 민감하면서도 복잡한 가상의 주제를 평생을 건 덕질과 탐구 정신으로 정면 돌파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최근 어니스트 클라인은 레디버스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메타버스 플랫폼 'The ReadyVerse'를 선보일 예정이라 한다. "미래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다."라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덕후는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말을 몸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평단 #레디플레이어투 #어니스트클라인 #메타버스 #가상현실 #덕후덕질 #디지털환생 #에이콘출판사 #스티븐스필버그 #전정순옮김 #신간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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