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 듣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0
이주혜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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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없는 목각 인형, 슬픔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 되다

현대문학 60번째 핀 시리즈, 이주혜 소설 <꼭두, 듣다>는 화자의 설정부터 독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무 인형이다. 입과 혀 없이 오직 커다란 두 귀만 존재하여 자신을 깎아낸 목수로부터 '큰 귀'라는 이름을 얻은 꼭두가 바로 이 소설의 화자다. 피나무 조각에서 태어난 꼭두는 자신을 창조한 박 목수의 한탄과 슬픔을 일방적으로 들이마시는 존재로 기능한다. 입이 없어 발화할 수 없는 화자가 귀만 열어둔 채 타인의 비화를 온전히 수용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처연한 미학을 선사한다. 목수가 조각칼로 나무를 파내며 쏟아내는 말들은 꼭두의 치밀한 나뭇결 사이로 고스란히 스며든다.


"내 몸은 주렁주렁 너무나 무거워 한없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시간의 우물 속에 턱까지 잠기고 말았습니다."


라는 꼭두의 고백은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청자의 숙명을 여실히 보여준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물이 억눌린 비극을 대신 증언하려 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텍스트 밖으로 넘쳐흐르며 숨결을 얻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피어난 생명, 외면할 수 없는 온기

박 목수의 삶은 끔찍한 비극과 맞닿아 있다. 소설은 아내의 난산과 죽음, 그리고 홀로 남겨진 핏덩이를 대면하는 사내의 참담한 내면을 조명한다. 아내를 잃은 충격과 절망 속에서 목수는 자신의 아이를 애써 '작은 귀신'이라 부르며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려 애쓴다. 그가 아내를 위해 만들었던 피나무 반닫이 궤가 죽음의 관처럼 느껴지는 순간 목수의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내려앉는다. 허나 삶은 기어코 죽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허기에 지친 아이가 서투른 몸짓으로 다가와 "물!"을 외치고 목수의 가슴팍에 뛰어드는 대목은 짙은 애잔함을 자아낸다.


"온통 흰 천으로 감싸여 사람 같지 않았던 그 작은 몸은 의외로 따뜻했습니다."


라는 구절처럼 목수는 아이의 붉고 작은 입과 생동하는 숨소리를 통해 다시금 삶의 온도를 회복한다. 아내를 향한 애틋함을 품은 피나무는 반닫이 궤가 되고 귀신이라 여겼던 아이는 목수의 삶을 다시 뛰게 하는 심장이 된다. 작은 귀신을 돌보며 "업어!" 하면 업어야 하고, "안아!" 하면 안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 목수는 혹여 아이가 박새나 솔새처럼 포르르 날아가 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기어이 치열하게 빛을 발하는 생명력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 의식이다.


소외된 삶을 껴안는 청취, 고통을 감내하며 피어나는 위안과 용서

꼭두는 단순히 목수 한 사람의 슬픔만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꼭두의 커다란 귀는 이승을 떠도는 혼령이나 공장에서 억척스럽게 청춘을 바쳐야 했던 누이들처럼 입으로 전해지지 못한 채 천대받는 작은 삶의 소리들을 향해 열려 있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작품 해설처럼 쏟아지는 타인의 고통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내고 들어야 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청자에게 쓰라린 통증을 남긴다. 상여를 장식하며 망자의 두려움을 달래주던 전통적인 꼭두의 숙명을 이어받은 화자는 자신을 향한 무수한 고백과 한탄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고독한 경청의 행위는 발화자는 물론이고 듣는 이 자신에게마저 위안과 용서의 감각을 선사한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온전히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는 유일한 구원이 되며 타인의 상처를 끌어안으며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꼭두의 존재는 그 자체로 단단한 연대의 의미를 지닌다.


상처를 대면하는 물리적 통증, 마침내 도달하는 해방..

며칠 전 감상한 데이빗 로우리 감독 영화 <마더 메리>의 강렬한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자해하여 벌어진 마더 메리의 가슴 상처에 샘이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 파격적인 행위는 언뜻 기괴해 보이지만, 결국 회피하던 끔찍한 고통, 트라우마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을 옭아매던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치유의 시발점이 된다. <꼭두, 듣다>의 화자가 겪는 무방비한 청취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책의 작품 해설에 인용된 파스칼 키냐르의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라는 문장처럼.. 꼭두는 밀려드는 타인의 난폭한 슬픔과 상처를 차단할 방도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입이 없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꼭두의 나뭇결 사이로 처절한 이야기들이 파고드는 과정은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물리적 통증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인의 참혹한 비화를 피 묻은 손으로 헤집듯 고스란히 품어내는 이 쓰라린 과정 끝에 비로소 화해와 구원이 찾아온다. 피나무 조각에서 시작되어 망자의 길동무가 된 꼭두의 운명은 결국 타인의 가장 은밀한 흉터에 기꺼이 닿으려는 맹렬한 애정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주혜가 빚어낸 독창적 서사, 경청이 지닌 구원의 힘

전작 <자두>와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미세한 파동을 예민하게 포착해 온 이주혜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한층 도약한 서사적 실험을 선보인다. 그는 화려한 수식어나 자극적인 전개 대신 단정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삶의 진실을 꿰뚫는다. 목수와 아이,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꼭두의 삼각 구도는 일견 기이해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이 슬픔을 극복하는 단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탁월한 장치로 작동한다. 꼭두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단 하나 타인의 비애를 밖으로 비워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처를 온전히 들어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텅 빈 공간으로 내어주는 이타적인 헌신이자 숭고한 희생이다.


작가는 입 없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현대 사회에서 점차 단절되어 가는 소통과 진정한 경청의 의미를 넌지시 묻는다. <꼭두, 듣다>는 과장된 수사 없이도 읽는 이의 마음을 강렬하게 흔든다. 그것은 단조로운 수식어 남발을 피하고 서사의 밀도에 집중한 작가 고유의 문학적 뚝심 덕분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가만히 끌어안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조용하고도 다정한 위안을 건넨다. 누군가의 슬픔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이미 훌륭한 치유의 시작임을 일깨우는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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