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작은 정원들 -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는 골목 정원 이야기
최윤선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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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북스 신간, 최윤선 지음 <북촌의 작은 정원들>은 치열한 의료 현장에서 타인을 돌보며 정작 자신은 방치했던 한 간호사가 도심 속 식물에게서 치유를 얻고 써 내려간 생명력의 기록이다. 저자 최윤선은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병원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사투를 벌이던 의료인이었다. 팬데믹 시절, 번아웃을 겪으며 동네 천변을 걷다 길가의 풀꽃에 눈길을 주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산림치유지도사이자 숲해설가로 변신하여 현재 북촌에서 '비퀠 도심숲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식물을 알아가는 과정이 일종의 자기 돌봄이었다고 고백하며, 멀리 있는 울창한 숲이 아니더라도 출퇴근길 골목에서 만나는 자연이 회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 책은 속도전에 지쳐 마음이 닳아버린 현대인들, 타인에게 에너지를 내어주느라 내면이 고갈된 이들에게 건네는 맞춤형 초록색 처방전이다.


아스팔트 틈새와 낡은 담장이 품은 비움의 길

작가는 북촌을 단순히 예쁜 카페가 늘어선 관광지, 핫플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가 안내하는 첫 번째 정원 '비움의 길'에서 독자는 안국역 주차장 갈라진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자라난 오동나무와 조우한다. 옛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심었다는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저자는 척박한 도시의 문법을 조용히 거부하는 단단한 생명력을 읽어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동 앞을 180년 넘게 지켜온 비술나무 세 그루에 얽힌 감상은 진한 잔상을 남긴다. 조선 시대 종친부부터 일제강점기, 기무사 터로 이어지는 곡절 많은 근현대사를 침묵 속에서 지켜본 이 거목들이 땅속에서 뿌리를 맞대고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통찰은, 수잔 시마드의 산림 생태학 연구와 맞물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연대의 가치를 일깨운다. 종친부 옥첩당 뜰에 핀 우리나라 특산 희귀종 미선나무의 향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학계에 보고된 식물학적 사료까지 꼼꼼히 짚어내며, 지식과 감성이 융합된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인내와 회복을 말하는 골목길의 식물 생태학

<북촌의 작은 정원들>에는 병동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지켜보며 벼려진 남다른 생사관이 녹아 있다. 창경궁 명정문 앞 돌 틈에 핀 작고 소박한 꽃다지를 보며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대신,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기어이 개화하고 마는 끈기를 찬양한다. 넓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꽃다지의 생태는 번아웃에 빠져 무너져 내렸던 작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굳건한 동력이다. 삼청공원에서 천천히 자라는 회양목을 향해 느린 성장은 정체가 아니며 응축이라고 전하는 메시지 역시 끝없는 효율을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의 조급증을 단숨에 녹여낸다. 원서동 좁은 건물 틈새의 쉬나무가 묵묵히 결실을 맺는 모습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작가의 태도는 타인을 돌보는 자에게도 반드시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는 명징한 진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소소한 발견이 건네는 위로와 구원의 정원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산책하며 병꽃나무, 황매화, 꽃마리, 미스김라일락 등 이름조차 정겨운 식물들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 책을 넘기다 보면 행복은 우연하고 소소한 발견에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무너진 마음을 구원하고 부축하는 대상이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소박한 뒷골목과 작은 정원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를 유발한다. 거창한 격려 대신 길가에 피어난 여린 생명들에 눈길을 맞추는 다정한 행위가 일상을 회복하는 든든한 지지대로 작용한다.


나만의 궤적을 긋는 실천, 산책 노트의 의미

책에 부록으로 제공되는 <북촌 산책노트>는 독자를 단순한 관찰자에서 적극적인 기록자로 안내하는 매력적인 장치다. 저자가 안내한 길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조그만 수첩을 챙겨 문밖을 나서서 자신만의 산책길을 새롭게 개척해 보기를 권한다. 매일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 보도블록이나 이름 모를 잡초,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가로수를 유심히 바라보고, 그 곁에 머물며 피어나는 독자적인 감상을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건강한 마음 챙김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나 화려한 수식어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식물과 교감한 흔적을 남기는 과정은,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고 단단한 평안을 다지는 소중한 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식물 산책기

저자 최윤선의 문장은 차분하고 정갈하며, 대상을 향한 시선은 따스하다. 자연의 위대함을 막연히 칭송하기보다, 보도블록과 담벼락 아래 서식하는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과학적인 식물학 지식과 결합해 서술한다. 식물형태학과 수목학을 파고든 이력이 묻어나는 정확한 명칭과 생태 묘사는 글의 신뢰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북촌의 작은 정원들>의 두드러진 장점은 거창한 명산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일상적 공간인 창덕궁, 계동길, 삼청동 골목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누구나 당장 문밖을 나서면 자신만의 치유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하고 호기심을 끌어올린다. 식물의 침묵에서 인간 존재의 이유를 길어 올리는 이 기록은, 한 개인이 소진을 딛고 일어서는 서사를 넘어 식물과 공간, 사람이 어떻게 교감하며 서로를 살리는지 증명하는 생태 인문학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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