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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다 / 2026년 5월
평점 :
1958년 중국 허난성에서 태어난 옌롄커는 1979년 등단 이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딩씨 마을의 꿈>, <사서> 등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하며 루쉰 문학상, 라오서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 등을 수상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그는 특유의 '신실주의' 기법을 통해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실험적인 문체를 선보이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힌다. 북다에서 새롭게 펴낸 옌롄커 소설 <연월일>은 프랑스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고, 전 세계 22개국에 번역 출간된 그의 대표 소설이다. 서문에 따르면 작가는 1996년 심각한 허리 질환으로 고통받던 중, 시안 교외의 옥수수밭을 걸으며 느꼈던 생명의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극심한 가뭄 속에서 발현되는 숭고한 휴머니즘과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어, 척박한 현실을 꿋꿋하게 견뎌내는 현대인들이나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할 만하다.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처연한 사투
소설을 여는 첫 문장이 처연하면서도 비장하다. 과연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의 솜씨답다.
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쳐 세월마저 타서 재가 되어버린 어느 해, 일흔두 살의 셴 할아버지는 피난길에서 돌연 발걸음을 돌린다. 음력 유월 열아흐레, 마을 사람들은 굶주림을 피해 동쪽 쉬저우를 향해 수십 일간의 험난한 이주를 떠나지만 그는 자신의 옥수수에 싹이 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로 남기를 택한다. 물론 정든 고향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바람도 숨기고 있었다. 태양빛이 온 세상을 붉게 달구고 먼지가 구르릉거리는 적막한 바러우산맥 전체를 통틀어 남은 생명은 노인과 눈먼 개, 여린 옥수수 싹 하나뿐이다.
주인 말을 곧잘 알아듣는 눈먼 개의 사연 또한 비통하기 그지없다. 기우 제물로 바쳐져 햇빛에 눈알이 타고 말라붙어 앞을 보지 못하는 개.. 허나 이 개는 주인의 앞길을 내다보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충견이다. 개는 주인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타들어 가는 열기 속에서 텅 빈 마을을 지키는 노인의 선택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으나, 이는 곧 생명의 근원을 향한 원초적인 집념, 투쟁의 시작을 알린다. 이웃집을 샅샅이 뒤져 텅 빈 자루만 쥔 채 허탈감에 빠지면서도, 찾아낸 소금 단지에서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머금고, 장님 개의 입에도 넣어주는 장면은 극한의 빈곤 속에서도 친구, 가족과 같은 반려견과 온기를 나누려는 연대감을 자아낸다.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 폐허 속에서도 두 생명체는 서로를 온전히 의지하며 질긴 숨을 이어간다.
절망과 마주한 옥수수 한 그루의 의미
생존을 위한 여정은 곧 무자비한 대자연과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소중한 옥수수 종자를 훔쳐 간 커다란 쥐 떼들과 양식 쟁탈전을 벌이고, 핏빛 으스름이 깔린 서산 아래에서 쥐구멍 서른 군데를 파헤치며 파김치가 되는 셴 할아버지의 모습은 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끈질긴 민낯을 대변한다. 노인은 옥수수죽을 미끼로 항아리 모양의 흙구덩이를 파서 쥐 여러 마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삶아 먹으며 버티고, 40리 밖에 있는 샘물 터까지 매일같이 걸어가 물을 길어 옥수수를 돌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쥐 떼에 이어 우물가로 몰려온 늑대 무리와 대치하는 에피소드는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한다. 멜대 갈고리를 쥔 채 눈동자조차 깜빡이지 않고 알파 늑대의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순간, 물 떨어지는 소리와 서서히 짙어지는 산속의 냉기가 교차하며 빚어내는 회화적인 묘사가 일품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려 자신의 손목을 힘껏 꼬집으며 장님 개와 옥수수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밤의 시간들은 고독을 넘어선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거룩한 희생이 잉태한 기적의 씨앗
옥수수를 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점차 타자를 위한 거룩한 헌신으로 나아간다. 양분이 부족해 옥수수 잎이 누렇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통탄하던 노인은 마른 잎 가운데서 한 방울의 초록빛을 발견하고 다시금 투지를 불태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녹슨 동전을 던져 자신과 장님 개 중 누가 먼저 옥수수의 거름이 될지 결정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은 정말 인간의 바닥을 뚫고 심연을 파고드는구나!" 허탈한 탄식을 자아낸다.
"이건 다 하늘의 뜻이야. 나는 옥수수를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하거든"이라고 읊조리며 자신의 남은 육신마저 기꺼이 바치려는 셴 할아버지의 태도는 생명의 존엄, 후대를 위한 희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훗날 비가 내린 뒤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할아버지와 개의 무덤 곁에서 자라난 옥수수 줄기에 맺힌 씨앗이다. 175페이지 "일곱 알만이 하늘의 별처럼 드문드문 잿빛으로 바짝 마른 알갱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척박한 땅에서 솟아난 일말의 희망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이 일곱 알의 씨앗이 일곱 가구의 새로운 모종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유구한 세월을 관통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한다.
결연한 죽음의 수용과 철학적 사유
<연월일>은 잔혹한 기후 재난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유려하고 공감각적인 시어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옌롄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포착하는 리얼한 신실주의 문법으로 말라비틀어진 대지 위에 희망을 파종하는 한 개인의 결기를 생생히 묘사했다. 김태성 번역가가 역자의 말에서 언급했듯.. 이 소설이 지니는 진정한 서사적 힘은 '다른 생명을 위한 죽음의 적극적인 수용'에 있다. 끝없는 공허함과 침묵이 짓누르는 환경 속에서 단 한 줌의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노인의 행보는 무모해 보일지언정 결코 헛되지 않다. 재앙의 한가운데서 피어난 이 고립된 사투는 결국 살아있음의 가치를 묻는 진중한 철학적 질문으로 맺음된다. 인류의 종말과도 같은 혹독한 위기 앞에서 문학이 어떻게 메마른 영혼을 적시고 고통을 뚫고 솟아나는 푸른 줄기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진정 경탄스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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