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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것 없는 행복 ㅣ 교양 100그램 12
서은국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평점 :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진화심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서은국 교수는 전작 <행복의 기원>을 통해 한국 사회에 행복에 관한 새로운 생물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에서 종신교수로 일했던 그는 인간의 행복을 철학적 당위가 아닌 진화론적 생존의 관점에서 해부해 왔다. 창비의 문고판 시리즈 '교양 100그램'의 열두 번째 책으로 출간된 신간 <어려울 것 없는 행복>은 이러한 저자의 학문적 궤적을 잇는 동시에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복을 감각하고 누려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사유를 더한다. 이 책은 다소 강박적으로 행복을 추구해 온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해독제로 작용한다. 특히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행복마저 하나의 달성해야 할 스펙이나 과제로 여기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행복의 본질을 명징하게 재정립해 주는 지침서라 할 수 있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결승선이 아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현대인들이 행복을 대하는 태도의 모순을 꼬집는다. 인간은 일상의 큰 관심사가 된 행복조차 하나의 인생 숙제처럼 여긴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쟁취해야 할 목표로 변질시켰다. 저자는 면접을 앞둔 수험생의 비유를 통해 지나친 절실함이 오히려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여 본래의 실력 발휘를 가로막는 현상을 설명한다.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도리어 우리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역설이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비롯된 목적론적 삶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다.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인생이라는 긴 경주를 달리다 보면 결승선에 행복이라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이러한 철학적 환상을 단호히 배격하며 행복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현재 뇌가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임을 선언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뇌의 작용
이 책의 핵심적인 통찰은 인간의 뇌가 애초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이래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지상 과제는 오직 생존과 번식 두 가지뿐이었다. 스마트폰을 쥐고 살아가는 현대 문명인의 삶은 인류 역사를 1년으로 압축했을 때 고작 마지막 몇 분에 불과한 찰나의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여전히 수렵채집 시대의 생물학적 목적에 맞춰 작동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이로운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강력한 신호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쾌감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은 모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생존 장치다. 결국 행복감이란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확보했을 때 뇌가 잠깐씩 켜주는 보상 신호에 불과하다. 뇌가 스스로 좋아하는 생존 관련 자원들을 일상에 자주 배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주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칠레의 해변
저자는 돈이나 사회적 성공을 행복의 전부라 믿는 태도를 사막에서 물을 찾는 행위에 비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좇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이는 행복을 유발하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행복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거창한 차력 쇼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 속에 수록된 2024년 칠레 비냐 델 마르의 사진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뒷받침한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산불의 검은 연기를 배경으로 해변에서 한가로이 공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사회였다면 작은 위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당장 대피하거나 불안에 떨었을 상황이다.
저자는 무결한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삶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상태를 기다린 뒤에야 행복을 누리려 한다면 우리는 평생 그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는 여유가 필요하다.
노르웨이 절벽과 인천대교가 묻는 사회적 안녕
책 중반부에서 저자가 비교한 노르웨이 트롤퉁가 절벽과 한국 인천 대교의 일화는 인상적인 대목이다. 안전장치 하나 없는 아찔한 노르웨이 절벽이 개인의 자연 감상과 경이로운 경험을 존중하는 철학을 보여준다면 자살 방지를 이유로 바다 뷰를 철제 펜스로 가려버린 인천대교는 위험 차단을 명분으로 일상의 즐거움마저 통제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더불어 저자는 한국인들이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물질주의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신이 체감하는 주관적 기쁨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태도는 행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다. 저자가 수십 년의 연구를 통해 도출한 행복의 흔들리지 않는 필요조건은 결국 '사람'이다. 상처받을까 두려워 고립을 자처하기보다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의 행복 전구를 켜줄 수 있는 이들과의 풍성한 사회적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제대로 알고 자주 느끼는 행복의 기술이란?
책 전반을 아우르는 저자의 행복론을 요약하자면 결국 일상을 재편하는 실천적인 지침으로 수렴된다.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행복은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주어지는 거창한 보상이 아니며 현재 뇌가 감각하는 긍정적인 신호 그 자체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했다면 다음 단계는 일상에서 자주 좋다고 느끼는 삶의 방향으로 과감하게 나아갈 차례다. 행복의 열쇠는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 거대한 성취를 위해 현재를 억누르기보다 자신에게 소소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행복의 압정'을 일상 곳곳에 적극적으로 흩뿌릴 것을 저자는 권유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행복의 필요조건이 가족이나 친구 등 다른 사람의 존재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고립되기보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연대하는 삶이야말로 진화가 인류에게 물려준 가장 확실한 생존법이다.
일상에 즐거움의 압정을 흩뿌리며..
창비 신간 <어려울 것 없는 행복>은 거창한 목표 대신 사소한 사회적 경험의 가치를 일깨운다. 표지 일러스트에 그려진 수박, 야구공, 아이스크림, 기타 등 다채로운 일상의 조각들처럼 행복은 촘촘히 박혀 있는 즐거운 경험들의 총합이다. 저자가 인용한 격언처럼 혼자 천국에 가는 것보다 좋은 친구와 지옥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강요하는 흔한 자기 계발서의 조언과 달리 이 책은 뇌의 메커니즘을 속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실체적인 경험을 직접 설계하라고 권한다.
추상적인 철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과학적 팩트와 명쾌한 문장으로 행복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 책은 치열한 일상을 견뎌내는 모든 이들에게 유의미한 인식의 전환을 선사한다. 삶의 곳곳에 작고 확실한 즐거움의 압정들을 흩뿌려두는 것.. 그것이 우리가 뇌의 생존 본능을 다독이며 오늘을 유쾌하게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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