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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위의 만찬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푸른숲 신간, 이용재 평론가 지음 <필름 위의 만찬>은 17년 차 음식 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과 해박한 지식이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안내서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 건축 대학원을 졸업한 저자는 애틀랜타의 건축 회사에서 일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이후 음식 평론가이자 번역가로 전향하여 조선일보, 한국일보, 에스콰이어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며 전문성을 입증했다. <외식의 품격>, <한식의 품격>, <냉면의 품격> 등 한국 식문화 비평 연작을 비롯해 <조리 도구의 세계>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고, 세계적인 요리책 <실버 스푼>, <뉴욕의 맛 모모푸쿠> 등을 번역하며 자신만의 영역, 스타일을 구축했다.
최근 여러 채널을 통해 영화를 미식의 관점으로 해체하는 시도를 선보인 그는 이번 저서에서 음식을 매개로 명작을 기억하는 감상법을 제안한다. 잘 다듬어진 문장과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책은 독자에게 허기와 욕망, 불안과 공감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환기하며 익숙했던 장면마저 신선하게 되살려내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스크린에 깃든 욕망과 억압의 미학
책은 크게 욕망과 허기, 권력과 기만, 불안과 위로, 공감과 우정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나뉘어 서사 속 식음료의 상징을 탐구한다. 1부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나홍진 감독의 2010년 개봉작 <황해>에 등장하는 처절한 먹방이다. 타향살이의 설움과 쫓기는 자의 본능이 응축된 구남(하정우 분)의 식사 장면, 특히 여러 장의 김을 한꺼번에 입에 욱여넣는 퍼포먼스는 단순한 섭취를 넘어 생존을 향한 맹렬한 욕망을 보여준다. 추가로 황해 편의점 정식, 감자 먹방에 대한 나름의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후반부 면정학 일당들이 빈집에서 커다란 뼈다귀를 뜯고 곯아떨어지는 장면은 이후 벌어질 잔혹한 칼부림 학살 이전의 정적이고 평화로운 잠시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음식은 때로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변모하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의 2003년 작품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 분)가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문도 모른 채 갇혀 먹어야만 했던 중국집 군만두가 그 적나라한 예다. 바삭함과 기름기를 머금은 튀김만두는 누군가의 일상을 통제하고 파괴하는 소름 돋는 장치로 작용하며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다.
권력의 쟁취부터 따스한 연대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식음료는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2006년 새롭게 리부트 된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분)가 주문하는 '베스퍼 마티니'는 긴장감 넘치는 도박장의 주도권을 단숨에 가져오는 권력의 표상이다. 반면 2022년 화제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등장하는 '에브리씽 베이글'은 세무 조사와 이혼 위기라는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다중 우주의 막대한 짐을 짊어진 에블린(양자경 분)의 허무와 혼란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독보적인 오브제다.
이러한 매개체는 계층과 인종의 벽을 허무는 연대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 영화 <그린 북>에서 거친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사 토니(비고 모텐슨 분)와 엘리트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가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을 나눠 먹는 장면은 흑백 분리주의 시대의 편견을 가로지르며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따스한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스크린을 장악한 관능과 기묘한 미식의 향연
책이 안내하는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나만의 영화 속 만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8년 개봉작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뜨끈한 나베 국수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비가 쏟아지는 날, 누추하고 허름한 집안에서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가 냄비를 마주하고 국수를 나눠 먹다 맹렬한 정사로 이어지는 신이다. 바닥을 뒹굴다 자칫 솥단지를 엎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날 정도로 격렬하고 에로틱한 이 장면은 식욕과 성욕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절묘하게 교차하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가브리엘 액셀 감독의 1987년 작품 <바베트의 만찬>이 선사하는 기묘하고도 성스러운 정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금욕적이고 청교도적인 덴마크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프랑스 최고 셰프 출신인 바베트가 복권 당첨금을 모두 쏟아부어 차려낸 일생일대의 요리는 예술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준다. 시각을 압도하는 미식의 향연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을 사람들의 경계를 허물고 영혼을 구원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반면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1989년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는 요리를 가장 잔혹한 복수극의 도구로 비튼다. 폭력적인 남편이자 도둑인 알버트에게 연인을 잃은 아내 조지나가 요리사 리차드와 공모하여 연인의 시신을 거대한 오븐구이로 만들어 남편에게 먹이는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식탐과 탐욕, 인간의 추악한 이면을 기괴한 색채와 미장센으로 그려낸 이 인육 만찬은 미식이라는 행위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은유를 제시한다.
미식 평론가의 눈으로 재구성한 시각적 체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마치 짜임새 있는 코스 요리를 대접받은 듯한 포만감이 밀려온다. 저자는 한 끼의 식사에 담긴 인간의 다층적인 심리를 건축학도 출신 특유의 정밀한 시선으로 해체하고, 미식 평론가의 풍부한 감각으로 다시 직조한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맴도는 요리의 냄새를 텍스트로 맡고 싶은 독자와 시네필 모두에게 <필름 위의 만찬>은 스크린 위 이미지를 새로운 감각으로 번역해 주는 특별한 장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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