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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두고 간 세계 - 돌봄과 상실 너머, 다시 시작된 사랑의 모험
천희란 지음 / 김영사 / 2026년 5월
평점 :
상실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다정한 애도의 모험담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치밀한 문장력을 인정받은 소설가 천희란이 11년 만에 첫 에세이 <고양이가 두고 간 세계>를 펴냈다. 작가는 그간 <영의 기원>, <자동 피아노> 등의 소설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진실을 짚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왔다. 이번 신간은 한 번도 반려동물과 살아본 적 없는 초보 보호자가 열다섯 살의 노령묘 세 마리를 맞이하며 겪은 돌봄과 이별, 다시 시작된 사랑의 기록을 담아냈다. 출간 직후 ‘슬픔을 직시하며 사랑을 창조하는 경이로운 기록’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작가는 "고양이를 사랑한 경험은 내 눈을 멀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새로운 눈을 주었다"라고 고백했으며, 대상화된 귀여움으로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책에 단 한 장의 고양이 사진도 싣지 않는 단호한 기획을 선보였다. 타인의 고통과 상실을 건강하게 마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권할 만한 진솔한 에세이다.
우울과 절망의 벼랑 끝에서 마주한 다정한 온기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 하나하나 만져지고 곤두서고 허공에 날릴 듯한 책 표지에 절로 손이 간다. 눈을 감고 살며시 쓰담쓰담하면 책 안에서 "아웅, 우끼끼~" 하는 특유의 갸릉거림이 들릴 것만 같다!
저자는 지독한 우울증과 자살 행동이라는 위태로운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순간들을 책 속에서 담담히 고백한다. 언제든 생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도 한 인간을 현실로 단단히 붙잡아 둔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들이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밥을 챙기고 화장실을 치우며 예민하게 상태를 살펴야 하는 돌봄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무너지려는 저자의 일상을 지탱하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무해하고 연약한 이 작은 존재들이 내뿜는 온기, 생명력 앞에서는 기꺼이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반려동물을 돌보며 치유를 경험한 수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극심한 우울감, 무력감, 공황에 빠져 스스로를 보살필 기력조차 잃었을 때, 나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감정 상태에 무심한 생명체에 대한 책임감은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구원이다. 작가 역시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고양이들이 건넨 묵묵한 위로, 아무 이해관계없는 머무름 덕분에 다시금 내일을 상상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고 털어놓는다. 타인의 고통에는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웠던 인간이 한낱 작은 동물의 체온에 기대어 상처를 꿰매고 살아갈 의지를 다지는 과정은 뭉클한 여운을 남긴다.
고양이가 두고 간 세계, 그 안에 남겨진 이름들
책의 서사는 고양이 나이 열다섯, 사람 나이로 팔십 대에 이른 세 노령묘 루이, 아라, 꼼(줄여서 ‘루아꼼’)을 입양하며 시작된다. 소멸이 예정된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초보 집사는 투병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고스란히 통과한다.
루아꼼과의 만남과 이별 한 몸집을 가졌으나 다정했던 루이, 다섯 마리 중 가장 머리가 컸지만 언제나 만만한 대우를 받았던 아라, 꼼꼼한 그루밍으로 보살핌을 받았던 소심한 꼼의 이야기는 각자의 고유한 성격만큼이나 생생히 다가온다. 급성 폐수종으로 먼저 떠난 꼼, 기나긴 투병을 견딘 아라,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 루이와의 이별 과정은 처절한 돌봄,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만일 다시 산소방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가장 빠르게 산소방을 대여하겠다는 작가의 다짐은 타인의 고통에 막연히 동화되기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운 자의 성숙한 태도를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 테오와 디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루아꼼이 떠난 빈자리에는 어린 고양이 테오와 디오가 들어온다. 낮잠 루틴을 철저히 지키며 작가의 야근을 허락하지 않는 테오, 쇼핑백 손잡이에 머리가 걸리는 트라우마를 겪고도 금세 잊어버리는 디오의 천진난만한 에너자이저 일상은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우는 동력이 된다.
보편적 인간의 세계와 고유한 고양이의 세계
작가는 책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가 맺어지는 방식의 차이를 예리하게 조명한다.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보편적인 인간성을 기대하거나 특정 그룹을 유형화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사회적 궤도 안에서 인간은 잦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나’를 확장해 나간다. 반면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는 결코 유형화될 수 없다. 고양이에 관한 행동학적 지식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는 있으나 관계의 본질은 각 개체의 고유한 성격과 경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한 고양이와의 관계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흠결을 직시하게 된다. 완벽하고 헌신적인 보호자라는 도덕적 신화는 애초에 불가능하며 인간은 죽음에 닿는 순간까지 결함투성이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서로의 결함을 이해하고 조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찰나의 경험 자체가 인간과 고양이가 나누는 유일무이한 구원의 방식이다.
상실을 안고 다시 품을 내어줄 용기
반려동물을 잃고 펫로스 증후군을 겪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다시 들이는 일은 극도의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반한다. <고양이가 두고 간 세계>는 그 막막한 망설임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정한 이정표가 되어 준다. 작가는 세상을 떠난 고양이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이 때로는 산 자들의 보금자리에 들르곤 한다고 고백한다. 생전 아끼던 캣휠, 수직 가구들, 스크래처 등에 어렴풋한 숨결, 그림자를 남길 때면 저자는 그들이 은연중 사라질까 봐 숨을 죽이고 자는 척한다고 말한다.
한 번의 사랑을 소진했다고 해서 마음이 닫히는 것이 아니다. 루아꼼이 남기고 간 슬픔의 공간은 사실 테오 & 디오가 뛰어놀 수 있도록 숨겨져 있던 작은 문을 열어둔 거대한 유산이었다. 상실에 압도당해 과거에 갇히는 대신 떠난 아이들이 가르쳐 준 사랑의 방식을 새로운 생명에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곁을 떠난 고양이가 우리에게 남겨둔 진정한 세계임을 이 책은 애틋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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