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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포인트 - 그저 행동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올바른 말을 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혜진 옮김, 배세진 해제 / 우중몽 / 2026년 5월
평점 :
트럼프의 재집권, 장기화되는 중동 전쟁, AI가 인간의 이념마저 대리하는 시대, 우리는 붕괴하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뼈아픈 질문과 마주한다.
우중몽에서 출간된 슬라보예 지젝의 신작 <제로 포인트>는 무너져가는 현대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세계적인 철학자 지젝은 복잡한 국제 정세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만 속에서 진실을 마주할 체계적인 혜안을 제시한다.
책의 제목인 <제로 포인트>는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 좌표계가 철저히 붕괴하여 더 이상 어떠한 시스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절대적 영점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장막이 걷히고 적나라한 폭력과 기만이 얼굴을 내미는 파국적 상황이자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다시 사유해야만 하는 출발점이다.
지젝은 미국 대선 정치판의 대중 심리를 분석하며 진보적 엘리트들의 오만함이 어떻게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지 지적한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개막식 연설을 통해 가자 지구 사태의 맥락을 살피는 것조차 반유대주의로 몰아붙이는 상황을 분석 금지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며 맹목적 지지가 지배 권력의 잔혹성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 경고한다.
AI 시대를 향한 통찰이 눈에 띈다. 알고리즘이 우리가 무엇을 선호하고 분노해야 할지 결정해 주는 거대한 디지털 통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사유할 주체성을 박탈당할 위험에 처했다. 지젝은 기계가 결코 대리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결여와 아날로그적 사유 과정을 껴안는 것만이 고유한 인간성을 방어하는 유일한 실천이라고 역설한다.
과연 개인의 도덕적 행동만으로 거대한 파국을 멈출 수 있을지 그는 냉혹하게 반문한다. 사유와 발언의 단계를 넘어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도모하는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탐욕스러운 자본은 언제든 인간을 통째로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안전선을 넘어 투쟁의 현장으로 기꺼이 나아가 올바른 말을 해야 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만이 붕괴된 제로 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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