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이유
이고은 지음 / 잔(도서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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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그룹 DNDD를 설립해 시각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고은 작가의 에세이 <계절의 이유>는 상실 이후의 삶을 다정하게 응시하는 책이다. 작가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보이지 않는 것들> 등 다양한 도서 표지와 삽화 작업을 비롯해 뮤지션 루싸이트 토끼, 작곡가 수린과의 아트워크 협업으로 섬세한 시각적 언어를 구축해 왔다. 전작 <산책가의 노래>에서 혼자 거닐며 마주친 일상의 반짝임을 포착했던 저자는 이번 신간에서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나보낸 뒤 홀로 남겨진 시간의 무늬를 글과 서정시, 그림으로 진솔하게 기록한다. 책 서두에 담긴 수채화풍의 고양이 스케치와 여백이 돋보이는 담백한 삽화들은 작가의 따스하고 섬세한 시선을 오롯이 담아낸다. 옅은 채색과 자유로운 연필 선은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일상의 작은 생명들을 다정하게 응시하려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이별의 아픔이 어떻게 일상의 풍경과 교차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저자는 아빠의 밀짚모자를 떠올리고 엄마가 전하는 마음에 귀 기울이며 나비가 잠든 시간을 통해 죽음을 애도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여행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우리나라 지도 꼬리 모양에 있는 포항 어딘가에서 아빠의 친구인 등대지기를 만나 먹었던 찐 호박잎과 쌈장의 맛은 가슴 한편에 생생히 살아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 피어난 빅토리아 연꽃을 찍기 위해 장화까지 신고 들어가 마른 수초를 걷어내고 개구리를 혼절시켜 연잎에 올리는 사진사들을 보며..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임을 깨닫는 대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도반을 기다리는 사찰에서 만난 스님이 휴대폰으로 보여준 습기 가득한 산기슭 풍경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진한 분홍색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던 겹벚꽃 나무는 먹먹한 슬픔 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경이롭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반려견 스티치의 연이은 죽음은 저자에게 가늠하기 힘든 상실감을 남겼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흐르는 시간, 변화하는 자연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상처를 다독인다. 파도리 해변에서 몰려오는 파도를 피해 온 힘을 다해 달리던 짧은 순간.. 생을 향해 곤두선 몸의 감각을 통해 잊고 있던 내일을 발견한다. "나는 여전히 살고 싶었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조금 더 오래 노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189쪽)라는 고백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이자 혹독하고 추운 계절을 지나와야 했던 뚜렷한 이유다. 공연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 눈이다 소리치며 함박눈을 맞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에서, 저수지 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새들의 군무에서 저자는 멈추지 않는 생의 박동을 느낀다.


우리가 끝내 살아남아 다가오는 계절을 기꺼이 맞이하고 견뎌야 하는 이유는 떠나간 이들이 남겨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나 자신의 삶을 묵묵히 완성해 나가기 위함이다. 꽃이 지는 이유가 다시 피기 위함이듯.. 내 삶의 계절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이유 또한 더 단단한 나로 거듭나기 위함임을 저자는 차분한 어조로 증명한다. 도서출판 잔 신간, 이고은 에세이 <계절의 이유>는 죽음이라는 시린 겨울을 통과해 마침내 삶이라는 따뜻한 봄으로 귀환하는 애틋한 여정이다. 비록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일지라도 그들이 내 삶에 남겨준 기억은 캔버스에 지워지지 않는 고운 채색이 되어 빛날 것이다. 돌아가는 길, 눈이 녹아 축축해진 흙을 밟으며 다음 계절이 우리에게 건넬 새로운 이유를 가만히 기다려 본다.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상실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기어이 다시 삶을 향해, 다가오는 계절을 맞이하려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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