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니 신간, 한국계 덴마크 작가 에바 틴드 장편소설 <뿌리 Ophav>는 정체성과 가족의 의미를 탐구하는 밀도 높은 서사로 출간 직후부터 국내외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소설은 입양과 결손 가정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각자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강렬하게 그려냈다. 주요 평단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을 자유롭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며 작가의 독보적인 재능에 찬사를 보냈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각자의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연대와 자아 발견에 이르는 과정은 낯설면서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 에바 틴드는 1974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덴마크로 입양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2009년 시집 <죽음>으로 데뷔한 이래 2010년 덴마크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클라우스 리프비에르그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소설 <한>을 통해 북한으로 떠나는 입양인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무성영화배우의 삶을 그린 <아스타의 그림자>로 2016년 오토 룽 작가 상을 받았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늘 경계에 선 이들의 고독과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관통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덴마크어 제목 'Ophav'는 근원 혈연 기원을 뜻하며, 'op'와 바다를 뜻하는 'hav'의 합성어로 생명이 발생한 태초의 바다이자 내면의 안식처를 상징한다. 특유의 시각적이고 추상적인 문체는 척박한 북유럽의 숲과 뜨거운 인도의 열기를 교차하며 독자들을 압도한다.
<뿌리>의 서사는 코펜하겐, 달라르나, 오로빌, 티루반나말라이, 서울, 마라도 등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1990년대와 2010년을 오가며 아버지 카이 어머니 미리암 딸 수이의 시점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성공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갈망한 미리암은 엄마의 역할을 버리고 스웨덴의 외딴 숲 달라르나로 떠나 홀로 예술혼을 불태운다. 홀로 수이를 키운 카이는 타인의 병을 고치는 신비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진다. 수이가 열여덟 살이 되어 독립하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카이는 치유를 위해 인도의 대안 공동체 오로빌로 떠난다. 한편 수이는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해 한국으로 향하고 서울 공항에 도착해 이방인으로서의 뼈저린 고립감을 느낀 후, 해녀들이 모여 사는 모계사회 마라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이가 서울 공항에서 구겨진 점프 슈트를 입고 단정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영어로 마라도에 사는 한국인 할아버지를 찾겠다고 도움을 청하는 장면은 이방인의 서글픔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뿌리>는 가족 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혈연의 무조건적인 화합, 동거를 강요하는 낡은 관습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개인들이 결국 각자의 고독한 여정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함을 보여준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위해 물리적 장벽을 쌓아 올리고 곁을 떠나는 미리암의 서사는 모성에 대한 전통적 기대를 배반하며 강렬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카이 역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에 짓눌려 있던 자아를 인도의 순례길에서 마주하며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이 책은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해 부유하는 현대인들에게 근원이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각자의 가슴속에 지닌 고요한 내면의 목소리임을 일깨운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기원을 똑바로 직시할 용기를 얻고자 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 속에는 각 인물의 내면과 관찰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문장들이 담겨 있다. 빈집에 남겨진 카이가 2010년 코펜하겐에서 쓴 편지 형식의 일기는 지독한 상실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