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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지옥
김인정 지음 / 아작 / 2026년 4월
평점 :
아작 신간, 김인정 소설집 <다정한 지옥>은 파국이 예정된 치명적인 사랑과 아스라한 동양 환상담을 엮어낸 수작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먼지와 진흙으로 가득한 가혹한 무협 세계 속에서 약점투성이 인물들이 엮어 내는 찰나의 로맨스를 탐구한다. 독자들은 타협 없이 맹렬하게 서로를 베어내는 참혹한 연정 속에서 숨 막히는 서정성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 김인정은 서강대 국문학과와 방송대 일본학과를 졸업하고 장편소설 <화조풍월>로 제3회 황금드래곤문학상 장편 부문 본심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환상문학 웹진 거울의 필진으로 활동해 온 작가는 동양적이고 서정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환상 소설과 로맨스를 집필해 왔다. <그때는 귤이 없었단다>, <홀연>, <차마 봄이 아니거니와> 등의 단편을 냈으며 '호노라'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로맨스 소설을 출간했다. 작가는 제도와 불합리한 숙명에 휩쓸리면서도 치열하게 살고 죽고 사랑하며 욕망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다. 삶의 굽이마다 걸려 넘어지면서도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인물들의 심리가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장으로 피어난다.
<다정한 지옥>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각기 다른 결의 매혹적인 세계를 펼친다. 시작하는 단편 <선화>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악명 높은 벼슬아치 육종득이 기생 난옥을 불러서는 수청을 들라 명하지 않고, 입묵 즉 문신을 새기고 싶다 청한다. 바깥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최후가 멀지 않았음을 자각했는지.. 그녀의 맨 등에 형형색색 극락을 새기고는 자신은 오랏줄을 받고 이슬처럼 사라진다. 기생 난옥은 자신을 선화라 부르는 오라버니 형완에게 바늘로 촘촘 새긴 극락세계를 단칼에 베어줄 것을 청하는데..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무협 로맨스 판타지는 긴장감을 더해간다.
신궁 내을에서 졸다가 짙은 푸른 문장을 마주한 국통 누마는 요망한 예지몽을 꾼다. 들불과 같은 사랑 앞에 당주는 화주가 되어 찾아올 것인가?_<누마의 여름>
서향 아씨를 남몰래 연모하는 노인 헌오는 정성껏 키운 서향화를 바라보며 야릇한 상상에 빠진다. 과연 어여쁘고 향기로운 그 꽃이 진 이후에도 연정은 이루어질 수 있을지..<화적> 등 뇌리에 박히는 인상적인 작품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책의 대미를 장식하며 무협 로맨스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리고 낙원까지>는 당대 최고의 고수이자 이검귀라 불리는 살수 연교가 유가장의 가주를 참살하는 잔혹한 장면으로 문을 연다. 눈보라를 헤치고 찾아온 가주의 어린 딸 아설은 복수 대신 원수인 연교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표지에 그려진 날 선 두 장검이 맞부딪치는 것처럼.. 언젠가 제자가 자신의 목을 칠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인 애착으로 곁을 내어주는 스승의 서늘한 연정이 깊은 잔상을 남긴다.
이 소설집이 돋보이는 이유는 일상의 안전하고 밋밋한 관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맹렬한 생명력이 서사 전반에 흐르기 때문이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이 불나방처럼 서로에게 뛰어드는 인물들의 핏빛 로맨스는 독자의 심장을 서늘하게 쥐고 흔든다. 작가는 타협이나 섣부른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의 지옥 속에서 철저히 부서지고 망해버리지만, 그 파멸의 끝에서 비로소 가장 찬란하고 기형적인 다정함을 길어 올린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지독한 애착과 집착은 역설적인 미학을 선사하며 책을 덮은 후에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코리아 판타지의 신비로운 분위기, 섬세하고 탐미적인 문장, 벼랑 끝에 선 인간의 짙은 욕망을 갈망하는 독자라면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무협로맨스 소설이다. 핏빛 웅덩이,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기이한 사랑의 형태를 목격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서늘하고도 다정한 지옥으로의 초대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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