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그라운드, 완투에서 불펜까지 - 야구광 철학자의 한국 야구 50년 관전기
탁석산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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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 지음 열린책들 출판의 <낭만의 그라운드, 완투에서 불펜까지>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전 고교 야구 시절부터 2024년 천만 관중 시대까지 한국 야구 50년의 궤적을 철학자의 시선으로 톺아보는 관전기다. 이 책은 단순한 스포츠 에세이를 넘어 삶의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철학서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최동원, 선동열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완투의 시대가 가고 철저한 분업화, 데이터 중심의 불펜 시대로 넘어온 야구의 변천사를 인생에 빗대어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 탁석산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1년 자연과학을 배우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력의 소유자다. 2000년 <한국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철학 읽어주는 남자>,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 등 다수의 저작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 온 실천적 철학자다. 매일 공부하는 철학자이자 자칭 야구광인 그는 평소 인터뷰, 강연에서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길어 올리는 작업을 강조해 왔다. 현학적인 이론을 배제하고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통찰력,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야구라는 스포츠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책 속에는 야구팬의 향수를 자극하는 다채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친척 아저씨에게 처음 들었던 선린상고 야구부 김태석, 김우열 선수의 이야기는 저자를 야구의 세계로 이끈 흥미로운 첫 기억이다. 1984년 4000만 명 남짓이던 우리나라 총인구가 2023년 5177만 명으로 늘어난 수치를 근거로 2024년 프로야구 1000만 관중 돌파의 원인을 인구 증가가 아닌 다른 시대적/사회적 요인에서 찾는 예리한 분석도 돋보인다. 베네수엘라 출신 강타자 미겔 카브레라가 2003년 데뷔해 200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한 뒤 통산 타율 0.306, 안타 3174개, 홈런 511개를 기록하며 2012년 타격 3관왕에 오른 과정을 조명한 대목은 메이저리그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화제가 된 추신수 선수의 SSG 랜더스 은퇴식을 두고 오랫동안 헌신한 팀이 아닌 곳에서의 은퇴식이 갖는 의미, 팬들의 차가운 반응을 철학적 의문으로 연결한 부분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낭만의 그라운드, 완투에서 불펜까지>는 흙먼지 날리던 동대문야구장의 여름날부터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가 지배하는 현대 야구까지 철학자의 집요한 시선으로 꿰뚫은 50년의 야구 기록이다. 저자는 야구의 진화 과정을 단순한 기술적 발전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선발투수가 끝까지 마운드를 책임 지던 완투의 시대가 저물고, 철저한 계산 아래 투수를 쪼개 쓰는 불펜의 시대로 넘어온 현상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본다. 투구 수 100개라는 현대 야구의 금과옥조 앞에서 투혼, 비장미라는 스포츠 본연의 서사가 증발해 버린 현실을 꼬집는 것이다.


야구를 인생의 축소판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라운드 위에서 벌어지는 실패, 좌절, 극복의 과정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생에는 구원투수나 대타가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마운드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선발투수의 뒷모습에서 발견한다. 비바람과 폭설이 몰아쳐도 결국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고 비장하게 마운드를 내려오는 완투패의 투수에게서 우리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저자가 효율성, 데이터로 무장한 현대 야구 속에서도 끝내 낭만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책은 야구팬들이 열광하는 기록의 이면을 들추고 우리가 잊고 지냈던 낭만의 감각을 일깨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았던, 고교 야구가 한창 인기를 끌던 동대문야구장의 기억이 책장을 넘기는 내내 아른거렸다. 숨 막힐 듯 쨍한 무더위 속에서도 관중석을 가득 채운 땀내 나는 응원의 열기, 흙먼지와 뒤섞인 야구장 만의 특유한 분위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동대문야구장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야구에 목을 매던 저자의 서술은 이처럼 각자의 개인적인 향수와 맞물려 단순한 과거의 회상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결과보다 과정에 환호하고 효율성보다 희생의 가치를 높게 샀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추신수의 은퇴식 논란, 미겔 카브레라의 타격 3관왕 대기록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현상 너머의 본질을 묻는 철학자의 집요함이 빛난다.


넘쳐나는 야구 콘텐츠 속에서 이 책이 빛나는 지점은 야구에 빗대어 삶의 태도를 묻고 있다는 점이다. 1000만 관중이라는 화려한 숫자 뒤에 가려진 야구의 본질 즉 승패를 떠나 그라운드 위에서 명멸하는 인간의 땀, 눈물, 투지를 담담히 써 내려간 문장들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야구를 깊이 사랑하는 팬이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들의 이름에 가슴이 뛸 것이고, 야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인생이라는 고독한 마운드에서 묵묵히 자신의 공을 던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묵직한 돌직구 같은 위로, 성찰을 건넨다.


"선린상고 야구부에 김태석이란 선수가 있는데 장타를 엄청 잘 친다 제일은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팀에 그 후배 김우열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체구는 작아도 꽤 잘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_7p


"완투패는 씁쓸하지만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도 졌을 때의 비장함이 있지요. 저는 완투패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던 투수들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인생에 구원투수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정도만 버티면 다음 사람이 기다렸다 도와주려 나타나고 그 사람이 자기 역할을 다하면 마무리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나요. 그런 일은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혼자 끌고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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