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환상 문학의 궤적이 자못 흥미롭다. 2026년 3월 12일 황금가지 출간, 장아미 작가의 신작 소설집 <우리 안에 불꽃이 있어>는 그 흥미를 확고한 신뢰로 바꾸어 놓은 수작이다.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조선 시대 최대 화재 사건인 한양 대화재, 처용 설화와 백일홍 설화, 일제강점기의 인체 실험, 근현대 인형 공장의 노동 착취 등 다채로운 시공간을 넘나든다. 이 작품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 설화의 틈새를 정교하게 파고들어 독자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권력의 부조리한 수탈에 맞서는 약자들, 특히 여성들의 연대를 우화적이면서도 묵직하게 풀어내어 한국형 환상 문학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혔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장아미 작가는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마음 수거함>,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등의 개인 저작과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수상 작품집 <데드볼> 같은 앤솔러지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 세계를 단단하게 다져온 소설가다. 전작들을 살펴보면 작가의 확고한 철학이 엿보인다. 작가는 환상을 단순히 서사를 장식하는 흥미 위주의 도구로 소비하지 않는다. 철저히 권력과 착취가 만들어낸 현실의 부조리를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로 삼는다. 작품 속 여성과 약자들은 결코 시대의 무게에 짓눌린 수동적인 피해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스스로 비극적 상황에 대응하며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서사의 중심축으로 당당히 기능한다.
책을 읽고 나면 서늘한 서글픔과 뜨거운 생명력이 동시에 밀려온다. 작가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스러져간 이름 없는 이들의 영혼을 '환상'이라는 섬세한 언어로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두 번째 수록작 <붉은 돛>은 이무기 설화를 변주하여 권력자의 탐욕스러운 명령으로 위험한 바다로 내몰린 어부들의 비극을 다룬다. 통제 불능의 존재를 건드린 오만이 어떻게 공동체 전체의 위기로 번지는지 서늘하게 경고한다.
다음 작품 <푸른 신명>은 역병이 창궐하는 끔찍한 와중에도 세금 징수에 혈안이 된 권력과 그 폭정을 피해 떠도는 유민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다. 생존과 통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참혹한 현실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소설집의 백미는 한양 대화재를 배경으로 한 <꽃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작품.. 만삭의 왕후가 모든 것이 타들어 가는 재난의 한복판에서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은 재난 앞에서의 책임과 개인의 주체적 선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인형들>의 배경이 되는 기괴한 공장 여공들 역시 영혼마저 착취당하는 억압적 구조 속에서 끈질기게 연대의 불씨를 지핀다. 이 밖에도 <빨간 제비부리댕기>, <도련님과 아가씨와 나> 등 각기 다른 형태의 환상 서사가 촘촘하게 엮여 있다.
이 책은 기괴하고 신비로운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치열한 인간 탐구의 기록이다. 억압받는 자들이 기어코 서로의 손을 맞잡을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작은 불꽃은 마침내 칠흑 같은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된다.
작품의 서사와 주제 의식을 관통하며 깊은 잔상을 남기는 문장들을 꼽아본다. 역사와 환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약자들의 연대와 사랑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