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특별증보판)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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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가 특별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읽게 된 책이다. 무엇보다 이번 특별증보판에는 유시민 작가가 새롭게 쓴 서문과 함께 존 스트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한 글도 추가되었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독서를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신만의 해석과 감정을 담아내는 개인적 성장의 과정이라 일컫는다. 그는 '책은 세상에 나온 순간 독자의 것'이라는 말을 통해 독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독자 각자가 고전을 통해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고 탐구하는 여정을 격려하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처음 마주한 <죄와 벌>, 몰래 불을 켜고 읽던 <공산당 선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에 대한 인식을 뒤흔든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대를 지나 다시금 자유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자유론>까지. 이 책 속 고전들은 저자의 삶과 시대, 그리고 사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은 왜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할까?',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가?', '사실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나는 진정 내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가?' 등과 같은 여러 본질적인 질문들을 고전을 통해 던지며 독자인 우리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되묻는다. 한 시대의 지성으로서 우리 사회에 늘 명료한 통찰을 던저온 저자가 청춘 시절의 독서를 다시 돌아보며 써 내려간 이 책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찰과 성장의 여정을 되짚게 만들며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준다.


이 책의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해석을 넘어선 깊은 성찰의 여정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으며 주목하게 된 두냐와 소냐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젊은 시절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두 인물의 존재가 나이를 먹은 지금, 전혀 다른 빛깔로 다가왔다는 그의 고백은 독서가 단지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비범한 사람들’의 논리를 중심축으로 한 <죄와 벌> 속에서 저자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인 두냐가 더욱 빛난다고 말한다. 속물 루쥔에게 탐욕의 대상이었고, 허무주의자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병적 집착의 대상이 되었으며, 라스꼴리니꼬프의 친구 라주미힌에게는 인생의 반려자가 된 인물인 그녀는 단지 이야기 속의 조연이 아닌,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애정을 쏟은 인물이었다. 특히 루쥔과의 결혼 문제를 두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의 삶을 단호히 거절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두냐의 말은 그녀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강인한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두냐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소냐와 같은 맥락에서 사랑과 존중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소냐가 몸을 팔며 가족을 부양했음에도 두냐는 그녀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따뜻하게 인사한다. 저자는 두 여인을 도스토옙스키가 끝없이 선망하고 흠모한 ‘러시아의 평범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해석한다. 유형지에 따라간 소냐가 죄수들에게 어머니이자 누이처럼 사랑받는 장면은, 두냐와 소냐가 결국 동일한 정신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저자의 시각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단순히 문학적 분석을 넘어서 고전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의 본질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과거에는 스쳐 지나갔던 인물이 다시 읽는 지금에는 중심에 서게 되는 경험이야말로 이 책이 주는 깊은 감동이며, 우리가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저자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펼쳐 들고, 그 속에서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대목이다. 그가 정리한 리영희 선생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고결하다. 진실과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리영희의 글을 읽으며 그 질문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처럼 느꼈다고 고백한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했느냐. 관료화된 정당과 정부 안에서 비판적 지성을 잃지는 않았느냐.” 그 질문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성찰을 게을리했던 순간들, 현실을 핑계로 진실을 외면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그는 ‘사상의 은사’ 앞에 서는 것이 왜 이토록 두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이 대목을 읽는 나 역시 그의 부끄러움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지식인이란 단지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실천에는 언제나 고통과 외로움이 따른다는 점에서, 리영희 선생이 살아온 길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묵직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고전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저자의 고백을 통해 독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특별증보판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다시 읽고 쓴 글을 새로 추가하였다. 이미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자유론>을 인용해온 유시민 작가는, 왜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국가와 정치의 풍파를 소화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했다.” 그 말처럼 <자유론>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마주한 현실을 해석하고 견뎌낼 수 있는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한다.


계엄령이 내려졌던 그 밤 이후, 우리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자유가 실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임을 몸소 깨달았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어떤 정치체제 아래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기본이며, 밀은 이를 명확하게 강조했다. 저자는 밀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겪은 위기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저력을 확인한다. 그는 밀의 말 속에서 위로를 받았고, 그 위로를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전하고자 한다.

밀은 1859년에 쓴 책에서 마치 오늘의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하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밤을 지새운 사람들, 계엄의 국회를 막아섰던 시민들,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청년들, 그리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자유와 정의를 향해 나아간 평범한 사람들. 유시민은 밀의 언어를 빌려, 이들에게 따뜻한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그대들은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나는 너무나 뭉클한 감동과 가슴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자유론>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유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를 지켜내기 위한 시민의 연대와 노력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밀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특별증보판에서 저자가 <자유론>을 선택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를 다시 묻고, 그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간곡한 당부이자 응원을 하기 위해서 아닐까.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한 가지 당부를 남긴다. 이 책은 고전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설서가 아니며, 자신의 시각으로 인해 책과 저자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책을 쓰는 사람에게 책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듯, 독자에게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자유롭게 읽고 각자의 감정과 사유로 받아들이는 독서의 기쁨을 일깨워준다.


책은 세상에 나온 순간 독자의 것이 된다. 다양한 삶의 경로를 거쳐온 유시민이라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혹은 그가 건넨 이 책을 따라 고전을 새롭게 만나는 경험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의 해석에 꼭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독서란 결국, 저마다의 시선으로 고전을 새롭게 마주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 책은 15권의 고전들을 향한 한 사람의 치열한 성장과 성찰의 여정이자,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과 함께라면, 고전을 읽는 일이 단지 과거를 넘겨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여정이 될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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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지 할머니 건전지 가족
강인숙.전승배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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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며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건전지 시리즈'의 신작이다. 가족간의 사랑과 일상 속 안전을 유쾌하게 풀어낸 <건전지 아빠>와 <건전지 엄마>에 이어 이번에는 가족의 중심이자 지혜로운 어른인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섬세한 입체 촬영 기법으로 구현된 생동감 넘치는 장면과 야생동물과의 공존이라는 의미 있는 미시지까지 담아내며 이번 책에서는 시리즈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특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듯한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표지는 이 책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면지에 적힌 할머니에 대한 글은 할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손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할머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음을 안겨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힘이 되어주는 할머니의 모습은 책을 읽는 우리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뜻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건전지 할머니는 세상에가 가장 씩씩하고 부지런한 건전지다. 마을의 중심이자 운동을 즐기는 동구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건전지 할머니는 매일 아침 혈압계 속에서 동구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방학을 맞아 손주 동구가 할머니를 찾아오면서 동구 할머니의 일상은 물론 건전지 할머니의 하루도 한층 더 분주해진다. 가스레인지 속에서 달콤한 간식을 준비하고, 라디오 속 DJ로 변신하여 동구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는 등, 건전지 할머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동구 할머니와 함께 동구의 하루를 즐겁게 만든다. 틈틈이 보고 싶은 손주 건전지들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리움 속에서도 씩씩하고 즐겁게 하루를 채워가는 건전지 할머니의 모습이 이야기 속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동구와 할머니는 함께 밭에 나가 옥수수를 따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할머니가 잠시 바구니를 가지러 간 사이 동구는 호기심에 이끌려 아기 멧돼지를 따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멧돼지 가족과의 맞닥뜨리게 된 동구는 놀라게 되는데... 과연 동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동구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가족 이야기를 넘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몸은 작지만 누구보다 큰 사랑을 가지고 있고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건전지 할머니의 우리 주변의 모든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만들며 미소짓게 한다. 손주를 향한 다정한 눈빛, 바쁜 하루 속에서도 잊지 않는 그리움,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용기와 지혜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깊이를 더욱 깊고 진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무렵, 건전지 할머니가 외치는 "충전 완료!"는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큰 울림을 남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지켜주고, 응원하고, 사랑하는 힘이 얼마나 크게 우리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면서 말이다.


알록달록한 펠트 인형과 섬세한 배경 소품이 어우러진 책 속 장면들은 시각적으로도 따스한 감정을 전하며 책을 넘길 때마다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이 책은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공감하는 가족이야기를 너무나 따스하면서도 재미나게 담아내며 우리 모두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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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A의 역사 - 노벨상 수상자가 밝히는 생명의 촉매, RNA의 비밀
토머스 R. 체크 지음, 김아림 옮김, 조정남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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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계기로 mRNA 백신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RNA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백신 개발의 핵심 기술로 RNA가 부각되면서, 그동안 DNA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생명과학의 구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기존에는 DNA가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여겨졌고, RNA는 그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RNA가 단순한 유전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생명 조율자이자 변혁의 주체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RNA는 생물학, 의학, 생명공학의 혁신을 이끄는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변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고 RNA에 대한 높아진 관심으로 인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89년 RNA의 촉매 작용(리보자임)을 발견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분자생물학자 토머스 체크가 집필한 책으로, RNA에 대한 깊은 과학적 통찰과 애정을 담고 있다. 책은 RNA의 과학적 발견부터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mRNA 백신 개발, 텔로미어를 활용한 노화 연구 등 21세기 생명공학 기술 전반을 아우른다. 또한 전축, 스파게티, 워드 프로세서의 ‘복사 붙여넣기’ 기능 등 일상적 사물과 개념에 빗대어 복잡한 RNA 작용 원리를 쉽게 설명하여 생명과학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떠오른 RNA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은 RNA가 어떻게 과학계에서 점차 핵심적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DNA가 생명의 열쇠로 여겨졌고, RNA는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RNA 역시 정보를 저장할 수 있으며, 세포 내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해 단백질 합성, 유전자 조절, 노화 방지 등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RNA 연구는 급격히 부상했다. 책은 종이접기에 비유될 만큼 유연한 RNA의 특성과, 이를 통해 생명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다양한 비유와 함께 쉽게 설명한다.


2000년대 이후 RNA 관련 연구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수많은 노벨상 수상과 함께 RNA 기반 의약품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코로나19는 RNA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SARS-CoV-2가 RNA 바이러스라는 사실과 이를 겨냥해 개발된 mRNA 백신은 RNA 기술이 오랜 시간 축적한 성과임을 증명했다. 팬데믹 속에서 저자는 RNA 연구자에서 RNA 대중 해설자로 역할을 확장하며, 대중에게 RNA의 작동 원리와 의미를 알리려 노력했다.


책은 또한 RNA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RNA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하는 치료 기술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RNA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질병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과 의학의 미래를 여는 열쇠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을 생생하고 일관되게 추적하며, RNA가 과거의 조연에서 생명과학의 주연으로 올라서는 전환점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R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집단지성을 활용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RNA 접힘 구조를 예측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느리고 불확실했지만, 저자와 동료 연구자들은 수천 명의 일반인이 참여하는 게임형 프로젝트 ‘eteRNA’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RNA에 대해 전문 지식이 없는 참가자들도 퍼즐을 풀듯 RNA 구조를 설계하고, 가장 가능성 높은 해답을 실험으로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3만 7,000명의 참가자가 수백만 개의 RNA 구조 퍼즐을 해결했으며, 이들의 아이디어는 실제 연구 논문에 공동 저자로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결과를 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는 안정성이 뛰어난 mRNA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슈퍼 접힘 구조’를 설계하는 데도 대중의 힘이 활용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는 풀 수 없는 복잡한 RNA 설계 문제를 게임 참가자들이 해결해낸 결과, 기존보다 월등히 높은 온도 안정성을 가진 mRNA 백신 후보가 탄생했다. 이는 향후 저개발국에서도 보다 쉽게 백신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중요한 진전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RNA 연구가 더 이상 소수의 과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집단지성과 대중 참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해나가는 분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과학 연구 기록을 넘어, 과학이 사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RNA가 생명의 놀라운 촉매제로서 처음 주목 받게 된 과정을 다룬다. 저자와 연구팀은 RNA가 단백질 없이도 효소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 즉 리보자임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생명과학 패러다임을 뒤흔들었고, 이 연구로 198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를 통해 RNA는 단순한 유전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생명 활동의 주체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2부에서는 RNA가 자연의 한계를 넘어 생명 자체를 개조하고 연장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RNA는 생명의 기원 문제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크리스퍼 기술을 통한 유전자 편집, 노화와 암을 결정짓는 텔로미어 연구, mRNA 백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고 있다. 이 책은 RNA가 어떻게 생명을 조율하고 변화시키며, 과학과 의학의 미래를 다시 쓰는 주요 동력으로 부상했는지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히 RNA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자연적인 원천과 인공적인 원천 모두에서 RNA가 어떻게 새롭게 진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확장될 가능성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특히, RNA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분자이자, 미래 생명공학의 핵심 도구로서 동시에 역할하고 있다는 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저자의 개인적인 연구 여정 또한 서사에 녹아 있어, RNA라는 경이로운 분자가 과학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그리고 이 책은 생물학과 의학의 현재를 넘어 미래를 조망하는 데 필수적인 책이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RNA의 복잡한 원리들을 다양한 비유와 설명을 통해 풀어내,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RNA를 기반으로 한 유전자 치료, 맞춤형 의약품, 혁신적 신약 개발 등 최첨단 생명과학 연구의 최전선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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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 사이드미러
여실지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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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라는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비행기의 갑작스런 흔들림을 의미하는 '난기류'는 단순히 하늘 위의 현상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사회와 일터의 불안정한 공기, 보이지 않는 압박과 긴장감을 상징하는 듯하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위계 질서가 강한 조직 속에서 과연 어떻게 담아내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고립감과 압박,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감정이 '난기류'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책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공허한 인사와 무심한 시선 속에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옥상 끝에 선 여자의 마지막 순간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그 짧은 찰나,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번지는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현장의 정적은 시작부터 큰 충격을 안긴다. 시신을 둘러싼 노란 테이프와 이를 둘러싼 무심한 도시의 풍경,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행인들과 사무적으로 움직이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의 절망과 고통이 얼마나 쉽게 묻히고 잊혀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이 책은 시작부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선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냉담함과 무관심,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고립과 괴로움이 가져오는 파국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길게 흩어진 꼬리구름이 마치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과 여운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수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때는 승무원의 꿈을 이뤘지만, 코로나19는 그녀의 삶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오랜 준비 끝에 간신히 승무원이 된 지 2년 만에, 가온항공에서 대규모 정리 해고가 단행되었고, 이수연 역시 일터를 잃었다. 불황에 빠진 항공업계는 무기한 무급 휴직과 해고를 번갈아 내놓았고, 그 결과 그녀는 생계를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도 예전의 활기는 사라졌고, 드문드문 들르는 손님들 속에 알파에어 승무원이 찾아왔다. “회사 그만두고 카페 아르바이트나 할까?”라는 승무원의 무심한 한마디가 이수연의 마음을 복잡하게 뒤흔든다. 본인은 선택이라 말하지만, 이수연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거리에서 들려오는 알파에어 시위대의 목소리조차도, 더 이상 일할 곳조차 없는 이수연에게는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같은 하늘길을 걷던 동료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생존 앞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된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어서 또 한 명의 주인공, 박은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찍 출근한 박은하는 알파연대 사무실에서 남상진을 만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남상진은 그런 은하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라며, 누구보다 애써왔으니 그만두지 말라고 간절히 붙잡는다. 그러나 은하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이미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성진이 나가고 들어온 정영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박은하가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컵을 후려친다. 커피와 얼음이 바닥에 쏟아지고, 유니폼에 커피가 튀면서 복도는 일순간 싸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정영주가 거칠게 자리를 떠나고, 동료들 역시 은하를 차갑게 외면한다. 순식간에 증오의 시선에 둘러싸인 박은하는 마치 땅 속으로 꺼지는 듯한 무거움을 느낀다. 유니폼에 번져가는 커피 얼룩처럼, 그녀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가 스며든다. 과연 정영주는 왜 박은하에게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이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박은하와 정영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관계와 갈등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고 싶게 만들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부는 박은하, 2부는 이수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저자는 주요 등장인물별로 교차 서술을 활용해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이처럼 다중 시점 스토리텔링을 통해 한 가지 사건을 각 인물의 입장에서 보다 깊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한 사건을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입장과 감정의 결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 책은 국내 1위 항공사 알파에어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두 여성 승무원의 이야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전개하는데, 1부는 이수연이 입사하기 전 해당 자리의 선임이었던 박은하의 이야기다. 은하는 온화한 성격과 뛰어난 사회성, 그리고 회사 홍보 모델을 맡을 만큼의 외모를 지닌 인물로, 노조 대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로 총무팀 업무를 지원하게 되면서 점차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의도치 않게 동료 승무원의 징계를 정당화하는 일에 연루되면서 은하를 향한 싸늘한 시선과 소외가 시작된다. 결국 징계 대상이었던 노조 선배가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이후로 과중한 업무와 동료와의 불화, 일터에서의 괴롭힘이 점차 심해진다. 은하는 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끝내 비행 중인 A380 항공기 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박은하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실제로 기내에서 박은하가 난기류를 만나는 순간이다. 갑작스럽게 기체가 흔들리자 박은하의 손끝에서 종이컵이 미끄러지고, 바닥에 떨어진 컵에서 액체가 튀어오른다. 그 작은 실수에도 못마땅하다는 듯 한 남성의 굵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은하는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극도의 긴장감과 위축을 느낀다. 이어서 동료 오지영은 카트에 물품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놀러 왔어? 컵을 왜 떨어뜨려? 옷은 또 왜 그 모양이야?”라는 차가운 말로 은하를 몰아붙인다. 이 장면은 실제 ‘난기류’라는 물리적 현상과 은하가 겪는 심리적 ‘난기류’가 교차하며, 직장 내에서의 미묘한 괴롭힘과 고립의 공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편, 꿈에 그리던 알파에어에 입사하게 된 이수연은 이미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박은하가 속했던 팀에 합류하게 된다. 은하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맴돌고, 팀원들 간의 관계 역시 불안정하게 변한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유사성 때문에 팀원들은 수연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하며 점차 그녀를 소외시킨다. 꿋꿋하게 버텨 보려 했던 수연은 점점 벼량 끝에 몰리는 심정을 느끼고 도움을 얻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지만 곧이어 노조마져 불안정한 사태에 처하게 된다. 더이상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나는 절망감 속에서 빠지게 된 수연. 과연 수연은 괜찮은 걸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오피스 스릴러를 넘어 현대 사회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압박과 고립,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함을 집요하고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항공기라는 밀폐된 공간, 엄격한 위계질서와 함께 펼쳐지는 직장 내 괴롭힘의 서사는 현실과 장르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며 우리 모두가 너무나 쉽게 외면했던 문제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의 매력은 괴로움의 원인을 상하관계의 단순한 대립에만 두지 않고 같은 동료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소외시키고 견제하는 동료 내부의 위계와 그로 인해 탄생하는 괴물성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따는 점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보기엔 단순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며 살아가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을 더욱 현실감있게 만들며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책의 뒤에 실린 평론과 에세이, 그리고 대담과 칼럼은 소설이 미쳐 다 보여주지 못한 사회 구조적 맥락과 심층적 시선을 더해 한권의 소설이 어떻게 사회적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는 지를 아주 상세히 풀어내고 보여주고 있다. 이는 책을 또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게 만들 뿐 아니라 더 오래 깊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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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대학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7
김동식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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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대학교'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평범한 대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파멸을 연구하는 대학이라니. 제목만으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띠지에 적힌 "그런 예감이 드네요. 저의 작가 인생 내내 '악마'란 존재를 주구장창 써먹을 것 같은 예감이요. 그러면 그게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김동식 작가의 유쾌한 멘트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높였다. 이미 <회색인간> 등 여러 작품에서 신박한 설정과 인간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매번 예상을 뒤엎는 반전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김동식 작가였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레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의 본성과 그 이면을 또 어떤 방식으로 그려낼지 책을 읽기 전부터 설레임을 느꼈다.


이야기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은 한 악마가 다급히 ‘악마대학교’ 강의실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늦게 들어온 악마 ‘벨’은 학구열에 불타는(실제로 불꽃이 이는) 동료 악마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앉지만,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곧이어 매해 6월에 열리는 ‘창의융합 경진대회’의 사전 발표가 시작되고, 벨은 ‘영생’을 주제로 시간 역재생기가 있다는 소문을 인간들에게 퍼뜨려 그 욕망을 자극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러나 교수는 “도대체 그게 뭔가? 그건 그냥 장난에 불과하잖아? 자네는 혹시 요정인가 악마인가?”라며 벨의 생각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자네 같은 조무래기”가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혹평한다. 벨은 창피함과 낙담을 안고 ‘인간 욕망 동아리’ 방으로 향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창의융합 경진대회’는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를 겨루는 지옥의 명실상부한 최대 행사다. 이 대회에서 주목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지옥 대기업 스카우트 여부가 갈릴 만큼 악마들에겐 절체절명의 기회다. 동아리방에서 벨을 맞는 친구 아블로와 비델은 각자 준비한 ‘사랑’과 ‘도박’을 소재로 인간이 파멸하는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며 그를 위로한다. 두 친구의 아이디어는 악마다운 치밀함과 냉혹함이 묻어나, 벨의 아이디어는 더욱 형편없어 보이기만 한다. 발표일은 점점 다가오고, 벨은 불안과 압박 속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경쟁에 뛰어들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지옥에도 악마대학교가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상상에서 출발하지만, 악마들도 학점을 따지고 취업을 걱정하며, 서로의 ‘악마적인 수법’을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치열한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이야기 속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벨은 친구들에게 마력을 빌려 자신의 ‘영생’ 시뮬레이션을 실연해보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벨, 너는 ‘계약의 기본 1’ 수업을 듣지 않았나? 인간과 계약한 내용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걸 배웠을 텐데,”라며 계약의 원칙을 어긴 점을 꼼꼼히 짚고, “네 수법은 너무 한정적이고, 그 인간이 특수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평가도 이어진다. 벨은 친구들의 지적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에서 악마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약의 기본’ 같은 수칙이 있다는 설정이 무척 신박하게 다가왔다.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 규칙과 원칙을 강조하는 악마들의 모습이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느껴졌고, 김동식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디테일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과연 벨은 자신만의 색다른 악마적 수법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좌충우돌 도전과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소설에는 김동식 작가 특유의 쉽고 담백한 문장,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날카로운 질문들은 강렬하게 살아 있다. 무엇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진짜 파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저자는 이야기 속 악마의 시선으로 오히려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악마대학교의 신입생에게 발행되는 ‘악마가 지켜야 할 규칙’ 세 가지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악마는 시간 약속을 엄수한다’, 그리고 ‘6월 창의융합 경진대회 발표를 앞두고 선배 악마들이 예민해질 수 있으니 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는 이 유쾌하면서도 신선한 설정이, 오히려 인간 사회와 닮아 있어 한 번 더 웃음을 짓게 한다. 악마라는 존재조차 결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점이 더욱 인상 깊다.


그리고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욕망에 욕망으로 답할 뿐”이라는 구절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임을 깨닫게 만든다. 악마조차 한발짝 물러서서 인간의 가능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선함까지 지켜보는 그 시선이 오히려 더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영생’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인간이 스스로 반복의 덫에 갇히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끝없는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는 결코 정답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중편소설이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도 김동식 작가는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았다. 일상에서 포착한 작은 아이디어와 세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김동식 작가만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 작품에는 또 어떤 매력적인 세계와 캐릭터, 그리고 어떤 질문을 들고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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