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마대학교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7
김동식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3월
평점 :
'악마대학교'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평범한 대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파멸을 연구하는 대학이라니. 제목만으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띠지에 적힌 "그런 예감이 드네요. 저의 작가 인생 내내 '악마'란 존재를 주구장창 써먹을 것 같은 예감이요. 그러면 그게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김동식 작가의 유쾌한 멘트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높였다. 이미 <회색인간> 등 여러 작품에서 신박한 설정과 인간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매번 예상을 뒤엎는 반전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김동식 작가였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레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의 본성과 그 이면을 또 어떤 방식으로 그려낼지 책을 읽기 전부터 설레임을 느꼈다.
이야기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은 한 악마가 다급히 ‘악마대학교’ 강의실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늦게 들어온 악마 ‘벨’은 학구열에 불타는(실제로 불꽃이 이는) 동료 악마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앉지만,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곧이어 매해 6월에 열리는 ‘창의융합 경진대회’의 사전 발표가 시작되고, 벨은 ‘영생’을 주제로 시간 역재생기가 있다는 소문을 인간들에게 퍼뜨려 그 욕망을 자극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러나 교수는 “도대체 그게 뭔가? 그건 그냥 장난에 불과하잖아? 자네는 혹시 요정인가 악마인가?”라며 벨의 생각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자네 같은 조무래기”가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혹평한다. 벨은 창피함과 낙담을 안고 ‘인간 욕망 동아리’ 방으로 향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창의융합 경진대회’는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를 겨루는 지옥의 명실상부한 최대 행사다. 이 대회에서 주목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지옥 대기업 스카우트 여부가 갈릴 만큼 악마들에겐 절체절명의 기회다. 동아리방에서 벨을 맞는 친구 아블로와 비델은 각자 준비한 ‘사랑’과 ‘도박’을 소재로 인간이 파멸하는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며 그를 위로한다. 두 친구의 아이디어는 악마다운 치밀함과 냉혹함이 묻어나, 벨의 아이디어는 더욱 형편없어 보이기만 한다. 발표일은 점점 다가오고, 벨은 불안과 압박 속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경쟁에 뛰어들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지옥에도 악마대학교가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상상에서 출발하지만, 악마들도 학점을 따지고 취업을 걱정하며, 서로의 ‘악마적인 수법’을 경쟁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치열한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이야기 속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벨은 친구들에게 마력을 빌려 자신의 ‘영생’ 시뮬레이션을 실연해보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벨, 너는 ‘계약의 기본 1’ 수업을 듣지 않았나? 인간과 계약한 내용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걸 배웠을 텐데,”라며 계약의 원칙을 어긴 점을 꼼꼼히 짚고, “네 수법은 너무 한정적이고, 그 인간이 특수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평가도 이어진다. 벨은 친구들의 지적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에서 악마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약의 기본’ 같은 수칙이 있다는 설정이 무척 신박하게 다가왔다.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 규칙과 원칙을 강조하는 악마들의 모습이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느껴졌고, 김동식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디테일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과연 벨은 자신만의 색다른 악마적 수법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좌충우돌 도전과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소설에는 김동식 작가 특유의 쉽고 담백한 문장,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날카로운 질문들은 강렬하게 살아 있다. 무엇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진짜 파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저자는 이야기 속 악마의 시선으로 오히려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악마대학교의 신입생에게 발행되는 ‘악마가 지켜야 할 규칙’ 세 가지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악마는 시간 약속을 엄수한다’, 그리고 ‘6월 창의융합 경진대회 발표를 앞두고 선배 악마들이 예민해질 수 있으니 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는 이 유쾌하면서도 신선한 설정이, 오히려 인간 사회와 닮아 있어 한 번 더 웃음을 짓게 한다. 악마라는 존재조차 결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점이 더욱 인상 깊다.
그리고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욕망에 욕망으로 답할 뿐”이라는 구절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임을 깨닫게 만든다. 악마조차 한발짝 물러서서 인간의 가능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선함까지 지켜보는 그 시선이 오히려 더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영생’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인간이 스스로 반복의 덫에 갇히는 모습은 현대 사회의 끝없는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는 결코 정답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중편소설이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도 김동식 작가는 자신만의 색을 잃지 않았다. 일상에서 포착한 작은 아이디어와 세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김동식 작가만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 작품에는 또 어떤 매력적인 세계와 캐릭터, 그리고 어떤 질문을 들고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