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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의 시대, 흙에서 길을 찾다!'라는 띠지 속 문구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흙을 통해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깊이 있는 시도를 탐고 있다. 저자는 토양생태학자로서 단순한 과학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흙에 내재된 문화적 상징성과 사회적 맥락까지 치밀하게 추적해 나가고 있다.
흙은 지구의 피부이자 생명의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이 책은 흙을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한국 진도의 논밭와 무덤이 공존하는 풍경,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화전농, 화산섬에서 막 태어난 어린 흙의 순간, 북극권을 파고든 지렁이의 생태적 침입까지 서로 다른 지역과 맥락 속에서 흙은 인간의 삶과 얽히며 역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현장을 누비며 채집한 토양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간과해 온 땅의 언어를 해독하는 하나의 방식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토양에 대한 그동안의 단편적인 인식을 넘어 생태계와 인류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흙은 단순한 자연물만은 아니라 유기물과 무기물, 생명과 비생명, 현재와 과거가 얽히고 설킨 복합적인 공간이며 인간과 자연, 문화와 생태가 만나는 접점이다. 흙 속에는 수천 년 전 죽은 식물의 유기물이 지금 막 뿌리에서 분비된 영양물질과 공존하고 마그마에서 생성된 광물과 최근 침전된 점토광물이 한 덩어리로 섞여 있다. 생명체의 탄생과 소멸, 노동과 기억, 관계와 시간이 뒤엉킨 뒤죽박죽의 장소로서, 흙은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는 무대이며 인간이 가장 오래, 가장 깊이 경험해온 자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흙을 생물학적 또는 지질학적 대상에만 가두지 않고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층위에서 새롭게 조망한다. 그리고 흙을 둘러싼 과학적 사실과 그 위에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담아 내었다.
이 책은 이러한 흙을 단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문화와 삶의 층위에서 사유해야 할 존재로 바라본다. 저자는 ‘똥’, ‘화전’, ‘쟁기’, ‘논’ 등 농업과 밀접한 주제를 통해 인간이 흙과 맺어온 구체적이고도 깊은 관계를 짚는다. 똥은 유기물의 순환을, 화전은 생태적 지혜를, 쟁기는 기술과 문명의 전환을, 논은 기후에 대한 적응의 산물을 보여주며 흙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미래의 토대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서 물과 강, 미생물과 지렁이, 그리고 흙의 ‘몸’과 ‘숨’이 어떻게 기후 변화와 연결되어 있는 지를 탐구한다. 흙은 숨을 쉬고 그 숨결은 지구의 탄소 순환과 맞닿아 있으며 인간의 활동은 그 균형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극지방 토양에서 일어나는 유기물 분해와 지렁이의 확산은 우리가 흙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기후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는 흙과 죽음의 관계로 시선을 옮긴다. 저자는 무덤과 밭이 함께 존재하는 진도의 풍경을 통해 흙이 생과 사를 연결하고 세대 간 시간을 이어주는 장소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처럼 이 책은 농사와 생태, 생명과 죽음,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서사 속에서 흙이 단지 땅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임을 되묻는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쟁기를 다룬 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저자는 쟁기가 단순한 농기구가 아니라 인류 문명 자체를 바꾼 기술 혁신의 상징이었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의 경제와 경관을 바꾸고 아메리카 대륙의 농업을 가능하게 한 것도 모두 쟁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쟁기의 자리는 더 이상 확고하지 않다. 토양 침식과 생태계 파괴를 낳은 쟁기 중심 농법은 이제 '쟁기 없는 농업’, ‘살리는 노동’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육식을 줄이는 실천이다. 그는 고기 소비를 줄이기만 해도 지구 생태계를 되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소고기를 끊으면 미국의 두 배가 넘는 면적의 농지를 자연에 돌려줄 수 있고, 양고기까지 줄이면 북아메리카 전체에 해당하는 땅이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인간과 가축의 오랜 관계를 되돌아보며 저자는 우리에게 꼭 이렇게까지 파괴적인 방식이어야만 했을까라고 묻는다. 결국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를 직면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의 말처럼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매일 식탁 위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작고 확실한 변화일 것이다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노동이 죽이는 노동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결국 이 책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명확하다. 지구를 파괴하지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는가? 저자는 이를 농업 기술, 생태적 상상력, 문화적 기억의 층위를 넘나들며 해부해간다. 농사라는 고대의 기술은 여전히 21세기 생태문명의 성패를 가르는 중심에 있으며 쟁기처럼 익숙한 도구 하나가 인간과 비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지렁이라는 친환경의 상징이 실제로는 어떤 생태계에서는 교란자로 작용한다는 사례는 생태계의 균형이 얼마나 지역적이고 조건적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생물 다양성 보존 논의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흙의 숨과 몸, 즉 생물학적·화학적 순환 체계의 미세한 변화가 기후 위기의 진폭을 키운다는 분석은, 인류의 생존과 흙의 안녕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책은 흙을 단순한 땅이나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생명과 문화의 토대이자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생태계로 조명한다. 저자는 다양한 지역의 사례와 과학적 탐구, 생태학적 통찰을 통해, 흙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자 지속가능한 미래의 열쇠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은 흙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 곧 인간 스스로의 삶을 지키는 일임을 강조하며 산업화된 농업이 남긴 흔적 위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또한, 흙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를 되짚으며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실천적 책임감을 환기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흙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삶의 감각을 되찾는 일이 가장 우리에게 지금 가장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