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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
맥스 포터 지음, 민승남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평점 :
부커상 심사위원장인 맥스 포터의 신작이라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짧은 분량 안에서 인간 존재의 균열을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슬픔은 날개 달린 것>과 <래니>로 이미 국내 독자에게 이름을 알린 맥스 포터는 이 책에서도 200쪽이 되지 않는 구성 속에 한 소년이 맞닥뜨린 결정적 하룻밤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가장 빠르게 초고를 완성한 동시에 가장 천천히 다듬은 책으로 알려져 그 압축된 서사 안에 치밀한 문장과 구조적 실험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소설은 한밤중 돌아오지 않을 산책을 떠난 십대 소년의 내면을 추적하며 외부 세계의 혼란보다 자기 안의 소용돌이와 싸우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출간 직후 《선데이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등극과 BBC ‘올해의 책’ 선정이라는 평가로 이어졌고, 이후 아카데미 수상 배우 킬리언 머피가 차기작으로 참여하며 빠른 영화화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짧은 분량 속에서 한 인물의 삶과 흔들림을 최소한의 언어로 구현해내는 저자의 고유한 문학적 기량이 이 책에서도 다시 한번 입증되고 있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소설을 자꾸 곱씹게 만든다.
소설의 도입부는 한 소년이 새벽 3시 13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몰래 시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으로 시작한다. 배낭 속에는 6억 년 된 부싯돌들이 가득 들어 있어 배낭이 무겁다는 반복적 묘사는 그의 상황적 압박뿐 아니라 정신적 혼란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샤이는 마지막 남은 마리화나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정글 테이프를 챙기며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과 불안 속에서 어둠을 통과해 나간다. 소년의 방에는 여러 아이들의 이름과 시간의 흔적이 뒤섞여 있어, 그가 속한 공간이 단순한 기숙사가 아니라 복잡한 과거와 규율이 쌓인 기관임을 암시한다.
도주 과정은 과장 없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샤이는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피해 카펫 중앙만 밟고 배낭끈이 끊어져 부싯돌이 쏟아질까 경계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이러한 신체적 긴장감은 그가 처한 불안정한 현실인 감시, 규칙, 처벌,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지나가는 생각들은 산만하게 흩어지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깊은 자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는 이처럼 한밤의 탈출이라는 단순한 사건을 통해 샤이가 감당해야 하는 정서적 무게와 혼란을 직접 체감하게 만들며 샤이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더하게 되고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어지는 샤이가 새벽 어둠 속을 걸어가는 장면은 소설의 핵심 정서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온 시간의 무게가 한밤중에 더욱 짙게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며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온다. 문제행동으로 낙인찍힌 채 라스트 찬스라는 이름의 대안 학교에 머물고 있지만 그 공간은 안정과 불안이 뒤섞인 환경일 뿐이다. 서로에게 거칠게 반응하면서도 뜻밖에 우정이 스며드는 관계, 규칙 속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존재하지만 샤이는 여전히 불안과 죄책감이 반복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다.
교사들은 그의 과거가 영원히 발목을 잡지 않도록 돕고자 하지만, 샤이에게 변화는 언제나 버거운 과제이다. 그래서 일까. 샤이는 자신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 굴레가 익숙해져 버린 탓에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와 조언은 샤이를 향해 있지만 그 말들이 실제로 작동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감정들은 그가 새벽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연못을 향해 가는 행동으로 응축된다. 배낭 속의 돌처럼 그는 스스로의 내면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파편화된 기억과 감정으로 요동친다. 소설은 이 과정을 '밤은 감각이 뒤범벅된 기억들의 파편, 그 깜빡이는 잔상이다, 그가 높은 데서 떨어져 박살이라도 난 것처럼, 사실 전혀 그렇지 않고, 그저 정처 없이 걸으며 기억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샤이의 혼란을 과장 없이 압축적으로 드러내며 한밤의 여정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충돌을 견디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극적인 사건에 의존하지 않기 보다는 한 소년의 감정과 신체적 감각을 정교하게 묘사해 나감으로써 그의 내면적 균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샤이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들은 그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리고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궁금하게 만들며 그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든다.
책은 한 소년의 위태로운 밤을 따라가며 성장 과정에서 겪는 불안과 감정의 무게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의 내면을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포착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인 교사의 말이나 친구들의 기억과 과거의 잔상,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나란히 배치하며 청소년기 특유의 혼란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바로 이런 접근 방식이 저자가 문학계에서 꾸준히 신뢰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단단하게 구축해내고 독자가 쉽게 짐작하거나 단정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유지하는 그의 문장들은 너무나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 책은 샤이의 미래가 특별히 밝을 것이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한 시기를 버티고 지나가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담아내고 있다. 라스트 찬스에서 들려오는 격려와 조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른 형태로 되살아날 가능성을 열어둔다. 결국 이 책은 삶이 주는 부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그 속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여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흔들리는 시간이 단순한 실패나 문제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순간을 지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경험일 수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