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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드롭, 드롭
설재인 지음 / 슬로우리드 / 2025년 7월
평점 :
설재인 작가의 신작이라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멸종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지금 이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거나 밀려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교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설재인 작가 특유의 유머와 연민, 그리고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사회적 통찰이라 하겠다. 가정 폭력이나 지방 소멸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는 동시에 '정상'이라는 말의 이면을 뒤집으며 독자로 하여금 무엇이 기준이 되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나는지를 묻게 만든다.
책에는 총 네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고 이 책의 표제작인 <드롭, 드롭, 드롭>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은 비혼 여성 예원과 그녀가 입양한 믹스견 ‘꼬똥’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야기는 예원이 전 애인을 따라 보호소 봉사를 하던 중, 열악한 환경에서 구조된 1살 반의 백구 꼬똥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전 애인은 봉사를 곧 그만두었지만 예원은 1년 간 꾸준히 꼬똥을 돌보다 결국 입양을 결심한다. 그녀가 꼬똥을 데려오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나은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또 하나는 꼬똥의 어미 은별이 보호소에서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예원과 꼬똥은 투룸 빌라에서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게 적응해간다. 예원은 추운 겨울에도 꼬똥이 좋아하는 호수 공원까지 산책을 다니며 깊은 유대감을 쌓아간다. 그러나 따뜻한 봄이 찾아오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꼬똥이 아이들을 극도로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활발하게 뛰노는 아이들이 공원과 일상을 가득 메우자 꼬똥은 공포에 질려 대로로 뛰어들 정도의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예원은 꼬똥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간식 훈련, 유치원, 가정 훈련사 등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 3살 반이 된 지금도 꼬똥은 어린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예원은 사회가 기대하는 ‘어린이를 좋아하는 개’의 이미지와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의 모습 사이에서 고민하고 이 간극 속에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예원은 가족과 거의 교류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다. 장녀로서 부모에게 일정한 용돈만 보내고 여동생 부부와는 1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장 종양 제거 수술을 계기로 5년 만에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심한다. 다만 문제는 꼬똥이었다. 어린이를 무서워하는 꼬똥을 두고 갈 수 없어 고민하던 예원은 여동생이 조카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여 안심하고 꼬똥을 동반한다. 하지만 가족 모임 도중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여동생의 시부모가 조카를 데리고 불쑥 등장하면서 꼬똥은 심한 공포 반응을 보이고, 예원은 이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동안 예원은 가족들로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고 수군거림과 눈초리도 참고 견뎌왔지만, 끝내 부모가 꼬똥에게 손찌검을 가하자 폭발하고 만다. 예원은 꼬똥을 품에 안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원은 곧바로 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 끝, 조용한 시골 마을 도상리의 낡은 주택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그곳에서 꼬똥은 도시에서는 보여준 적 없던 활달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 예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한 생명에게 두렵지 않은 하루를 선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예원은 이상한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의 연령 구조가 뒤바뀌어 자신은 아이의 몸이 되고, 꼬똥은 어른을 두려워하는 본능대로 예원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심하게 떨며 오줌까지 싸고 만다. 예원은 절망한다. 이제야 비로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유일한 존재조차 더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꼬똥에게 손을 내밀고 싶지만, 그 손이 이제는 공포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예원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결국 이 책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실의 균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고, 또 누구의 곁에 머물 수 있을지를 물으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책에 담긴 네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사라지는 존재들과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밀려난 개인,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바로 그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 책은 그런 삶들을 섬세하게 이야기하며 외면보다는 이해를, 단절보다는 연결을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멸종'이라는 단어를 빌려 지금 여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감정과 관계, 존엄의 실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속도 앞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작은 존재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무너지는 세상에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이 책에 담긴 그 진심어린 이야기들은 왠지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응원으로 느껴지며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