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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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호오도 부차적인 문제 같다. 작가는 자신의 본질적 질문과 씨름했고, 반드시 이 주제를 이 방식으로 써야 했으리라. 좋은 작품은 이런 필연성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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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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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병을 앓고 막 회복된 오십 대의 여성이 있다그녀는 아름다운 6월의 어느 아침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그날 저녁그녀의 집에서는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이 소설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다소설은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열기로 한 어떤 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녀의 청춘에서 노년까지의 세월이 또 하나의 시간적 흐름을 이룬다. 소설은 이 두 개의 시간이 엮이면서 전개되는데하나는 현실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 속의 시간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여러 관점에서 무수한 독법으로 읽힐 수 있는데, 무엇보다 형식이 매우 낯설다는 점에서 독특한 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일반적 서술 방식을 크게 벗어나서,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을 한 축으로 많은 주변인들의 시점이 마치 수건돌리기처럼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다사람들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이 이상한 방식은 하나의 인상하나의 풍경이 내게 있어서만 그렇게 보이며 동일한 것을 놓고도 우리는 그것을 모두 다르게 해석한다는 진리를 새삼 환기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말해지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을 다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중요한 두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며, 이것들은 삶이라는 대주제로 귀결된다.

 


우선 시간에 대해서.

소설의 전개는 마치 모든 물줄기가 모여들어 하나의 큰 강물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인물들은 작은 물줄기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고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몸집을 불려서 유장하게 흐르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룬다. 부분이 전체로 합쳐지는 모양새인데, 이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닌 더 큰 무엇이다. 강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히 물의 집합체가 아니듯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여서 이야기들이 아니라 ''이라고 불리는 더 궁극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낸다.


혹은 이 소설을 꽃다발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한 송이 한 송이를 모아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 듯 소설의 전개는 한 인물 한 인물이 모여서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이루는 과정 같다.

꽃다발은 실제로 소설의 상징처럼 쓰이고 있는데, 소설 첫 문장은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p.7)'로 시작된다. 이 꽃다발은 그날 저녁에 있을 파티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중요한 두 친구는 그녀의 젊은 시절을 '흰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하며, 댈러웨이 부인의 남편은 부인에게 사랑의 징표로 꽃다발을 안기기도 한다


그런데 강물은 흘러가서 붙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든다. 삶은 불확실하며 무상하다강물이 흐르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어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 내 앞의 순간들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꽃을 시들게 하는 것도 시간이다. 유한한 삶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게 마련이고 사는 매 순간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계속 등장하는 시계탑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기억하라, 인간의 삶은 끝난다'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젊음은 끝나며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댈러웨이 부인은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파티를 준비한다. 병을 앓고 나서 본격적으로 노년에 접어든 여인에게 이러한 행위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런데 진짜 무의미할까? 바로 이 지점이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한 시간, 그 시간을 살아내는 인간의 유약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은 모순될 수도 있을 두 생각을 '그래서'로 잇는 매우 독특한 마음의 소유자인데, 이를테면 '레이드 브래드쇼는 딱하게도 우둔한 여자야-미워할 수가 없어.(p.239)' 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삶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어리석고 연약한데 '그래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그리고 두려움.

삶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사랑을 잃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이 된다. 댈러웨이 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시간이 젊음의 아름다움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늙어가고 끝내는 죽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녀의 두려움은 삶의 어두운 뒷면까지 포괄하는 더 복잡하고 큰 성질의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녀의 두려움은 삶을 실패할 위험성에 대해서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인정한다:


'두려움이라는 것도 있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이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평온하게 지니고 가야 한다는 것에 덮쳐 오는 무력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끔찍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p.241)'  


댈러웨이 부인은 삶을 사랑하는 인물이고, 파티를 열어 삶을 축제로 만들고 싶은 인물이다. 마치 흰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품에 한가득 안아 들 듯이 그녀는 삶의 순간들을 사랑으로 조합하고 창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저녁이 찾아오고 파티가 막 시작됐을 때, 눈치 없는 손님으로부터 한 청년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는 놀라고 두려워 빈방으로 숨는다. 그녀는 청년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죽었으니까. 실패와 죽음, 이 이중의 사실 앞에서 그녀는 두려움에 떤다.  


죽은 청년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셉티머스라는 인물로, 의사가 자신을 부인으로부터 떼어내 요양원에 격리시키려고 집을 방문하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청년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p.195)' 하지만 요양원에 격리되어 사랑하는 부인과 떨어져야 하는 삶은 자신의 영혼이 손상되는 삶이었다. 청년은 삶을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고통의 어둠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죽어야 하는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뛰어듬'이라는 행위는 이 소설에서 의미심장하다. 설사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다. 영혼과 삶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맨 앞머리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아침에 꽃을 사러 집 밖으로 나가며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다(p.7)‘고 느낀다. 그녀는 찬란한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실패와 늙음과 죽음을 함유하는 위태로운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한 청년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오십 대의 한 여성이 아침의 대기 속으로 뛰어든다. 한 사람은 죽음의 복판으로, 또 한 사람은 6월의 빛나는 아침이 펼쳐지는 삶의 복판으로. 둘은 결국 같은 사람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고 삶을 지극히 사랑한 샴쌍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은 삶을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을 향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는 이 두가지 얼굴이 다 들어있지 않을까.


 

시간과 두려움이 합쳐질 때

시간과 죽음 그리고 삶의 실패가 만나는 정점은 삶이 환희가 마법처럼 펼쳐지려고 하는 파타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청년 셉티머스의 죽음을 전해 듣는 바로 그 순간이 그녀의 두려움이 최고조에 이를 때이다. 황망히 작은 방으로 숨어 들어간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꺼내보며 남편이 곁에 있기에 자신이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청년과 자신의 차이점이라면 청년은 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뿐. 그런데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병에서 회복된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좀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p.241)’


병이란 작은 죽음과도 같아서 그녀가 죽음을 통과했기 때문일까? 죽음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일종의 부활이고 재생일 것이다. 그녀는 젊었을 때부터 하늘을 바라보는 일을 즐겼다. ’하늘에는 그녀 자신의 일부가 들어 있는 듯했다.(p.242)’ 지금도 그녀는 어둡고 작은 빈방에서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본다. 그런데 맞은편 집에서 노부인이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그 노부인은 평소에도 그녀가 존경심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창밖 맞은편 집에 사는 노부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고, 침실에서 커튼을 열고 방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 광경에는 어딘가 엄숙한 데가 있었다... 영혼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드는 광경이었다.(p.167)' 


삶이란 죽음을 곁에 두고 담담히 그 순간을 사는 것인가, 찰나에 명멸하는 빛의 눈부심 같은 것인가. 영혼은 그러한 삶을 위해 존재하고 그런 삶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응접실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웃고 소리치고 하는데, 이렇게 조용히 저 노부인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각별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나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Pp.242-243)‘


죽음이 있는 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청년이 죽었지만 파티는 이어진다. 태양의 열기가 뜨겁다해도 두려워 말고 뛰쳐나가는 것이다. 죽음은 마치 노부인의 잠자리처럼 평화로운 것인지 모른다. 댈러웨이 부인이 죽은 청년이 불쌍하지 않다고 느낀 까닭은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 일이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그녀는 왠지 그와 자살을 한 청년과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p.243)'


청년이 내던져 버린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인데, 이 삶은 뜨겁게 달아오른 태양이 내뿜는 열기이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겨울의 횡포이기도 하다. 댈러웨이 부인은 청년의 마음을 알았고, 그래서 청년이 모든 걸 내던져 버린 게 기뻤다. 태양과 겨울로부터 자유로워졌으므로.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냈으므로: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 나오는 이 구절을 댈러웨이 부인은 거듭 떠올린다. 버지니아 울프는 태양의 열기와 겨울의 횡포 속에서 그 두려움과 싸우며 순간을 살아내는 것, 계단을 오르고 싶으면 오르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는 노부인처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 찬란한 6월의 아침 대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하늘을 바라보는 것, 종교도 사랑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삶 그 자체와 나의 존재를 맞대고 부비는 것. 동전의 뒷면인 죽음과 하나가 되어 동전의 앞면으로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삶이고,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환희이며 마법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지키는 것이라고.

 


 

고통스러운 정신병을 앓고 끝내는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넣고 강물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드라마 같은 인생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나약한 비관주의자였을 거라는 오해를 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지적이고 통찰적인 이 소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두려워했지만 명료한 의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고, 남편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멈추고자 했기에 죽음으로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고, 용감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삶을 사랑한만큼 죽음도 기꺼이 껴안을 수 있었을 거라고 느낀다. 댈러웨이 부인이 구사하는 그래서가 여기에 가장 극적으로 구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삶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를 선택했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결혼 전에 클라리사라고 불렸다. 물론 결혼 후에도 그녀는 계속 클라리사였지만 친구의 눈에 속물로 비치는 세속적 여인인 댈러웨이 부인이 순수한 영혼의 클라리사를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현세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댈러웨이 부인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댈러웨이 부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클라리사가 죽으면 안 됐다. 두 존재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혼자 힘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피터는) 그녀가 늙었다고 생각할까? 그가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할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쪽에서 눈치 채게 될까? 그가 돌아와 보니 그녀가 늙어 있더라고? 사실 그랬다. 앓고 난 후로 그녀는 머리가 거의 새하얗게 세었다.

브로치를 탁자 위에 놓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경련을 느꼈다. 잠시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를 틈타, 얼음처럼 차디찬 새발톱이 가슴속을 파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직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쉰두 번째 해로 접어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여러 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월, 칠월, 팔월! 한 달 한 달이 여전히 옹글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떨어지는 방울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클라리사는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며) 바로 그 순간의 핵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거기에 고장시켰다 이 유월 아침의 순간을, 다른 모든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는 이 아침의 한순간을 고정시키듯, 그녀는 거울과 화장대와 늘어선 병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면서, 자신의 전부를 한 점에 모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섬세한 분홍빛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려는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수없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던가! 그럴 때마다 얼굴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긴장되곤 했다. 거울을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꼭 오므렸다. 그러자 얼굴에 구심점이 살아났다. 예리하고, 화살 같고, 분명한, 그것이 그녀 자신이었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부름, 어떤 노력이 부분들을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_ 한데 끌어 모을 때의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중심, 하나의 다이아몬드, 응접실에 앉아 사교의 중심이 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따분한 생활에 분명 생기를 돌게 하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아마도 피난처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P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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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에티 힐레숨 -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지음, 이창엽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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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 힐레숨은 네덜란드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에티 힐레숨은 열한 권의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이 책은 에티의 일기와 편지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추린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책에 인용된 글들을 통해서나마 에티 힐레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책의 부제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이고 저자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걸로 미루어, 근본적 변화란 신을 모르던 사람이 신을 알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책 날개에도 에티 힐레숨의 일기와 편지가 홀로코스트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신앙 고백 문서라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녀는 초교파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은 기독교라든가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기성 종교의 신으로 한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신은 그 신들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곳, 더 근원적인 곳에 머문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이슬람 경전 코란과 유대교의 탈무드가 들어있었고, 그녀가 애독한 책들은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시인 릴케 그리고 신약성서였다.

 

에티 힐레숨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다. 마치 신약성서의 바울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회심이 신비로웠던 것처럼 에티 힐레숨의 그것도 그렇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가늠할 수 없고, 마치 성경을 읽듯 한 줄 한 줄을 세심하게 읽으며 오래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모든 사람은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해. 우리가 세상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증오를 더하면 더할수록 세상을 더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 최근에 깨달았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순간을 낳고, 생생한 가능성이 충만하며,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같을 때가 있다. 문제가 있는 순간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부질없이 오래 끌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풍요로운 순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장대한 일련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 지금 나는 햇빛 아래 작은 테라스의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빨래통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밤나무의 단단하고 짙은 색 가지 위에 해가 걸려있는데, 과거와 분명히 달라진 게 있다.... 과거에는 지성으로 나무와 태양을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말로 쓰고 싶었고, 모든 게 서로 잘 어울리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깊은 원시적 느낌을 정신으로 헤아리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자연과 모든 걸 나에게 복종시키고 싶었다. 그것을 설명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그대로 놓아둔다... 햇빛 아래 앉아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는데, 마치 이 새로운 삶의 인식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문득 깊은 내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생각으로는 아무 데도 도달할 수 없다. 생각은 학문 연구에 훌륭하고 뛰어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감정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다루려면 수동적이 되어야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조각 영원과의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

 

- 언젠가 분명히 생각과 감정의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 말하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완전히 침묵하고 가장 깊은 존재의 소리가 울리게 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 내 안에서 가장 깊고 최선인 것, 그것의 이름은 신이다.

 

- 지금은 전쟁 중이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그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는 걸 안다. 박해와 억압, 독재, 무력한 격노, 잔인한 가학증에 대해서도 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안다... 하지만 내가 무방비 상태일 때,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문득 삶의 맨 가슴the naked breast of life에 안긴다. 삶의 팔은 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보호해 주고, 나의 심장 박동은 아주 느리고 규칙적이며 부드럽고 조용하고도 한결같이 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하고 자비롭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도 그렇다. 전쟁이나 그 어떤 몰상식한 인간의 잔학 행위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 한가지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여,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작은 조각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살핍니다.

 

-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다.

 

- 밤에 수용소에서 판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주위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용히 코를 골거나 꿈꾸면서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흐느끼거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낮에 나에게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느낀다면 분명히 미쳐 버릴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몇 시간이고 잠들지 않은 채 누워서, 한없는 다정함으로... “제가 이 막사의 생각하는 가슴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 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도 말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국경이 없다.

 

- (암스테르담의 긴 도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대인 출입이 금지된 길가의 카페들을 지나쳤고, 옆으로 유대인 탑승 금지 전차가 지나갔다. 그 순간 에티는 깨달았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땅 위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지치고 발이 벗겨졌다... 내가 지치고 병들고 두려울 때 난 혼자가 아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살았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나이고, 모든 고통은 삶의 일부다.

 

- 만일 (수용소로 가라는)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면으로 물러나 내 몸과 영혼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끌어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테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 뒀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바지 한 벌과 상의를 만들어야겠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최선을 다해 안심시킬 것이고, 짬이 날 때마다 그에게,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려 할 것이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많고 많은 충치를 때워야겠다. 수용소에 있을 때 이가 아프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배낭을 구해서 꼭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품질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성경을 가지고 갈 것이고, 릴케의 얇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가져가고, <기도시집>도 한 구석에 끼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진은 가져가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얼굴과 익숙한 몸짓들을 모아 마음 속의 공간 벽에 걸어두겠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 두 손과, 단단한 어린 가지처럼 표현이 풍부한 손가락들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러면 두 손은 기도로 나를 보호해 주고 마지막까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탐색하는 표정을 지닌 짙은 색 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 한때 히틀러가 나오고, 다른 때는 폭군 이반 4세가 나오고, 다른 때는 종교재판이, 그 다음에는 전쟁, 전염병, 지진, 기근이 일어난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고통을 견디는 것, 고통에 대처하는 것, 자기 영혼의 작은 구석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는 내면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신과 천국은 물론 지옥과 땅과 생명과 죽음과 모든 역사가 우리 안에 있다. 외부는 단지 많은 버팀목일 뿐이고, 필요한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것과 더불어 악한 것까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악한 것을 고치는 데 삶을 바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개인들에게 증오를 쏟을 수 없다.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된다. 체제가 그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자신이 처한 특정한 개인적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밭아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들도 슬픔, 불의, 굴욕에 대응히야 하고 끔찍한 부당함과 굴욕을 겪을 때도 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 마음을 해쳤다.) 불온한 구조는 무너질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로, 심문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심문 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도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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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인상주의 그림 50
이네스 야넷 잉겔만 지음, 이정연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품절돼서 아쉽다. 판형이 비교적 크고 인쇄도 나쁘지 않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됐고 작품 설명도 개성 있다. 인상주의에 대한 전형적 시각을 벗어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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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 1
다이애나 뉴월 지음, 엄미정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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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작품 20점을 선정해 세부적으로 감상하게 만든
책이다. 화가가 어떤 색들을 사용했는지, 붓질과 구도는 어떤지, 그림의 주제를 어떻게 잡았는지 등 설명이 전문적이고 구체적이다. 저자의 안목이 참신하고 유익하다. 번역은 절대 나쁘지 않으나 판형이 작아서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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