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은 앞선 두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와 완연히 달랐다. 앞서 두 작가에게서는 비장하고 숭고한 태도와 정신주의를 봤다면 에우리피데스를 읽으며 느낀 첫 인상은 나쁘게 말하면 넋두리 같았고, 좋게 말하면 대중소설 같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더 읽어갈수록 이상하게도 앞서의 두 작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서적 울림이 점점 커졌다. 다른 모든 것들, 이를테면 애탄하는 여자들이며 삐딱한 시선들, 메마른 논리 같은 것들 뒤에 숨어있는 부드러운 공감능력이랄까, 연민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니 울렸다, 내 마음을.

 

전집 1권의 첫 작품 <메데이아>의 강렬함은 극단적인 내용과 극단적인 여자주인공의 모습 때문에 그저 강렬함 그 자체로 남을 뻔했으나 잘 읽어보면 사실 그 안에는 부드러운 여성이 숨어있다. 많은 고통을 겪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한 인간이 숨어있다.

 

<트로이아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에우리피데스의 연민이 전면으로 나서는 작품이어서, 누구는 줄거리의 빈약함을 말하지만, 나는 가슴 아프게 읽었다. 다 읽고 나면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을 들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던.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내 첫 인상을 결정적으로 뒤짚은 작품은 단연코 <박코스 여신도들>이다. 무의식과 의식을 문학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랄까. 음, 천재였구나, 이 작가는...

 

<힙폴뤼토스>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나온다. 고통스러워하는 여인 파이드라와 정결한 남성 힙폴뤼토스, 그들의 정당함과 이 두 정당함이 양립할 수 없어서 빚어진 비극을 바라보며 코로스는 노래한다. 경계 너머의 세상을. 고통 없는 세상을.

 

아아, 내가 가파른 산의 은밀한 동굴들 안에 머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신께서 나를

한 마리 날개 달린 새로 만들어

날아다니는 무리들 사이에 옮겨놓으신다면!

그러면 나는

아드리아스 해변의 파도와 에리다노스의 강물 위로 솟구쳐 오를 수 있을 텐데!

그곳은

헬리오스의 가련한 딸들이

오라비 파에톤의 죽음을 슬퍼하며

넘실대는 자줏빛 강물에

호박색 찬란한 눈물을 흘리는 곳.

 

그리고 나는

노래하는 헤스페리데스들의 사과나무가 자라는 해안까지  날아갈 수 있을 덴데.

그곳은

줏빛 바다의 주인이

아틀라스가 떠받치고 있는 하늘의 신성한 경계를 지키면서

선원들이 그 너머로 항해하지 못하게 막고,

불멸의 샘들이

제우스께서 누우셨던 곳 옆으로 흘러내리며,

생명을 가져다주는 신성한 대지가

신들께 축복을 더해주는 곳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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