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펭귄클래식 7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리어 왕>은 가족의 이야기이자 사회비판적 우화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을 담은 매우 복잡하고 다면적인 작품이다. 어떤 주제를 잡고 읽어도 생각할거리가 넘쳐난다. 전공자라면 작품의 얼개와 언어구사면에서도 도전적인 호기심을 느낄 것 같다.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렵고 언뜻 보면 막장 아침드라마 같은 극단적인 파국의 드라마다.

 

우선 가족 이야기로서, 이 작품에는 두 아버지가 나온다. 한 아버지는 리어 왕으로, 그는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의도는 애초에 순수하지 못했다. 왕은 묻는다.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한다 말하겠느냐? 그에게는 부녀간의 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보상을 베풀겠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사랑이 수량화될 수 있다는 것, 그에 따라 물질적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은근하고도 노골적으로 '받은만큼 나를 돌보라'는 요구다. 리어 왕에게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거래일 뿐이다. 아버지의 이기심과 자식의 이기심이 적정 선에서 계약을 하는 것일 뿐, 사랑은 다만 '향기로운' 번역어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왕이 가장 사랑한 세째 딸 코렐리아는 "폐하를 사랑합니다만 자식의 도리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하며 이것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전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기심에, 사랑의 변질에 거부한다. 그리고 설사 진실된 사랑이라 해도 부녀 간의 사랑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구속할 수는 없다는 뜻도 암암리에 드러낸다. 

리어 왕은 분노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번에 부녀의 정을 끊어버린다. 그는 극단적으로 충동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 반추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결국 그는 자신을 그대로 빼닮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두 딸에게 전 재산을 주었으나, 그들에게 버림받고 미쳐서 폭풍우 치는 들판을 헤매게 되며, 끝내는 세째 딸의 주검을 품에 안은 채 생을 마감한다.    

 

<리어 왕>에 나오는 두 번째 아버지는 글로스터 백작으로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하나는 적자인 에드거로서 좋은 청년이며 효자다. 둘째는 에드몬드인데, 그는 서자이고 아버지를 수단으로 삼아서 재산과 명예를 얻고 싶어한다. 그는 애초에 비뚤어진 본성의 소유자다. 리어 왕이 첫째와 둘째 딸에게 왕국을 분할해주면서 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와중에 에드몬드는 계략을 써서 아버지와 에드거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에드거를 내쫓고 아버지 역시 철저하게 배신한다.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은 결국 두 눈까지 잃고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아버지는 이기적이거나 어리석다. 그들은 자식을 소유물로 착각한다. 그들은 아버지이되 무조건적 사랑을 모른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유형의 자식들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한쪽에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동생을 질투하는 두 딸과 자신을 서자로 만든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 있고,  맞은쪽에는 결함을 지닌 아버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으로 감싸는 막내딸과 적자가 있다. 괴물 같은 자식들과 천사 같은 자식들이 인간의 선악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에서 끊임없이 본성을 언급한다. 인간은 선악을 본성으로 타고 나기는 할 테지만,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 공존하는 것이라서 아버지의 일부를 자식은 하나의 인격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리어 왕은 자신의 악한 두 딸들을 향해 말한다. "너는 나의 살, 나의 피, 나의 딸이다. 아니 너는 차라리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질병이라서 내 것이라 불러야만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고로부터 이어져온 부동의 진실, 즉 사랑이 아닐까 한다.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에서 천상적인 사랑의 자락을 리어의 막내딸 코딜리아와 글로스터의 아들 에드거에게 드리워놓은 듯 싶다. 악랄한 자식 에드몬드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힘과 명예가 아니라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른다. 리어 왕의 두 딸이 서로 질시하며 에드몬드를 차지하려고 싸웠던 것 역시 그들에게 결핍됐던 사랑이었는지도. 두 딸은 이 싸움으로 죽었고, 에드몬드는 죽으면서도 비로소 충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에드먼드는 사랑받았다. 나를 위하여 한쪽이 다른 쪽을 독살하였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런데 그렇게 선하고 명예로운 코딜리아와 에드거의 내면에도 혹시나 무의식적인 공격성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나를 소유하려는 아버지, 나를 의심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것의 검은 그림자가 코딜리아를 난국의 희생 제물로 만들고, 에드거로 하여금 사회 가장 밑바닥의 떠돌이 미치광이로 가장해서 스스로를 자학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들의 희생과 추락이 혹시 아름답게 변장한 공격성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왕의 큰딸과 둘째 딸 그리고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 에드몬드의 냉혹함이 오래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그들이 오히려 리어 왕보다 안쓰럽다. 그들의 결함과 결핍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으므로. "형체를 바꾸고 본성을 감추고 있는 것이 당신을 괴물로 만들게 하지 마시오."라는, 큰딸에게 주어지는 경고가 실은 나를 비롯한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말은 아닐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폭풍우 속으로 뛰쳐나간 늙은 아버지 리어 왕을 보며 큰딸은 아버지를 다시 데려오려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고집불통들에게는 자기 스스로 초래한 상처들이 엄한 선생님과 다름없어야만 합니다." 미움이 냉혹함으로 변할 때, 그래서 연민을 지울 때, 우리는 괴물이 된다. 우리 안의 결함과 결핍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한없이 냉혹해진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작품인 동시에 매서운 사회비판을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리어 왕은 두 딸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폭풍우 치는 들판으로 나간다. 딸들은 신하 없이 혼자 몸으로 자기들 밑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지만, 리어 왕은 자기 자신을 거친 자연 속에 내팽개치고 자학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딸들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그는 폭풍우 속에서 미쳐버린다. 그리고 비로소 사태의 본질, 삶의 본질을 본다.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급작스럽게.

한때 오만한 왕이었던 그는 말한다. '나는 아주 어리석고 실없는 늙은이라오. 더도 말고 덜도 말로 여든 살을 먹었소." 라고. 그리고 자신의 왕좌 아래로 내려다보던 모든 이들의 본질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너는 사물 그 자체로구나... 벗자, 벗어, 빌린 것들을! 자, 여기 단추를 풀어라." 모든 사회적 표피 아래 인간은 사물처럼 그저 가치중립적이며 미약하고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의 사회 고발은 느닷없기도 하다. "농부의 개가 거지에게 짖어대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권직이 있는 개한테는 복종하는 거지... 죄에 황금 칠을 하면 강력한 정의의 창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지는 것이다..." 리어 왕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회의 부패를 꿰뚫어보게 된 것일까. 그는 단지 두 딸에게 버림받은 전직 왕이었을 뿐인데.  

어쨌거나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의 입을 통해 그 당시의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서문의 필자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을 1606년에 제임스 왕과 신하들 앞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미친놈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질병 아니더냐." 라는 대사를 들으며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하여간 그 뒤 1649년에 제임스 왕의 아들 찰스 1세가 처형당했고 왕국이 공화국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는 참으로 대담했다. 

 

그동안 나는 무의식 중에 셰익스피어를 모차르트와 견주었던 것 같다. 밝고 경쾌한 천재쯤으로. 그것은 <한여름밤의 꿈>이나 <마음대로 하세요> 같은 작품에서 받은 유쾌한 인상 때문인 듯 싶은데, 사실 여러 작품에서 셰익스피어가 다룬 주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리어 왕>의 비극성은 격렬하고 극단적이다. 거의 모든 인물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절단내 버리고, 근원적이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온 부모자식의 사랑 이면의 이기심과 악마성을 드러내며, 한 사회의 계급질서 자체를 조롱하는 <리어 왕>의 과격함과 비극성을 그 어떤 작품이 따라갈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세상의 기존 가치들을 모조리 비웃고 부정하고 전복시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문에서 필자 키어넌 라이언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작품 초반에 에드먼드가 에드거를 속이는 대목에서 그는 "제가 듣고 본 것만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아주 어렴풋하게만 말해서 그 끔찍한 실상 the image and horror of it은 채 보여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리어 왕이 세째 딸 코들리어의 주검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에드거가 비통해하며 말한다. 이것은 "그 참상의 이미지image of that horror인가?" 라고. 작품은 이렇게 처음과 끝이 'the image of horror'로 이어지면서 이 연극이 하나의 이미지임을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의도했던 것일까? 극단적인 비극성으로 연극을 낯설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관객이 줄거리가 아니라 비극의 이미지에 집중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일까? 진실은 이미지의 형태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렇게 추상화된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며 끝나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연극무대 밖으로 가지고 나와 실제 세상에, 우리 자신에게 입혀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통해 이 세상을, 우리 자신을, 인간의 본성을 바라본다. 모두 파괴되고 말아서 어쩔 수 없이 맨눈이 되어버린, 어쩔 수 없이 솔직해져버린 눈으로 말이다. 글로스터 백작의 두 눈이 파였다는 것은 어쩌면 이것을 상징하는 것일지 모른다. 기존의 관점은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셰익스피어는 작품 여러 곳에서 솔직함을 강조한다. 리어 왕은 코딜리아를 향해 '꾸밈을 모르는 저 물건'이라 부르고 리어 왕의 충신인 켄트는 '솔직한 것이 제 직업'이라 말한다. 주인공들이 모두 죽고, 모든 가치가 파괴돼 버린 자리, 처참한 마지막 무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까.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는가. 빈터, 빈 자리, 처음, 다시 모든 것을 바르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 혹시 이런 것들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고,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리어 왕>의 마지막 무대가 우리에게는 무에서 시작하는 첫 무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비극의 이미지로 보는 이 세계를,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 리어 왕의 말대로 우리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고 태어나면서 우는 까닭은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기 때문인데, 에드거가 절망 속에서 자살하려는 아버지에게 주는 충고가 실은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 올 때만큼 세상을 하직할 때도 사람은 인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자, 갑시다." 뼈 속 깊이 신랄하고 냉철한 회의주의자가 주는, 겨울 찬 바람처럼 냉정한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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