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마르케스 자서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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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각기 갈 길이 있고, 결국 그 길을 따라가게끔 되어있는 것 같다. 다르게 살고 싶어도 다른 식으로는 살지 못하는 것이다. 마르케스의 자서전을 읽으며 더 분명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마르케스는 책 제목처럼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야 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삶은 격정적이고 다채로우며 자유롭다.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말할 것이 많은 인생이었다. 마치 큰 강이 유장하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의 생은 그렇게 거대한 강처럼 느껴진다. 

 

자서전이 그 자체로 한 권의 소설이라고나 할까. 첫 문장도 마치 소설의 첫 문장 같다. '어머니가 집을 팔러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자신이 소설가로서 살기로 결심했던 20대 초반에서 출발해서 어린시절의 기억들로 돌아가, 이러저런 사건들이며 인물들, 경험들을 설화처럼, 민담처럼, 판타지처럼, 풀어놓는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추억담은 소년기, 청년기로 이어지다가 책이 2/3쯤 접어들 대목에서 20대 초반으로 돌아온다. 나머지 1/3은 20대 후반의 기억들이다. 30대 이후의 삶은? 자서전은 아마도 애초에 대하소설처럼 몇 권으로 기획됐던 모양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도 궁금하고 특히 노년의 마르케스가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알고 싶지만, 유년기와 청년기의 이 이야기들만으로도 그의 자서전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당시의 복잡하고 요동치는 콜롬비아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 그 속에서 이리저리 쓸려가고 쓸려오며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의 모습, 외부의 폭풍 못지않게 내면에서도 격렬하게 성장통을 앓았던 시절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여러 면에서 놀랐다. 그 중 하나는, 마르케스 개인의 자유로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가 용납하는 자유로움이었다. 우리도 수십 년 전에는 아이들이 더 이른 나이에 성인이 됐었던 것 같지만 콜롬비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듯 싶다. 10대 후반 아이들은 이미 어른처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은 20대가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온실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르케스가 성장했던 1900년대 초중반의 콜롬비아는 한마디로 야생이었다. 그 야생에서 젊은이들은 훨씬 더 거칠게, 훨씬 더 야생적으로, 훨씬 더 동물적이고, 훨씬 더 경험적인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정제되고 이성적인, 높은 단계의 지성에 이르고자 하고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려고 하는데, 결국 도달하게 되는 사회는 어쩌면 너무 위생적이고 너무 기계적인, 말하자면, 죽은 사회는 아닌지 모르겠다.

 

마르케스는 자기 말로는 소심증이 병적이라고 할만큼 심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의 에너지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자신의 외부로, 사람들에게로, 사회로 향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사고는 정적이고 정갈한 한 점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앞으로 힘차게 달리고 뻗어나가는 듯이 보인다. 작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는데, 마르케스의 소설은 그의 이러한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마르케스는 말한다.

 

.... 이 세상에도 다른 세상에도 한 작가에게 무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가 그런 패배감에 빠지는 것조차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여전히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청년시절에 법대를 중퇴하던 시기에 젊은 마르케스는 한동안 깊은 좌절감 속에서 헤맸던 것 같다. 위의 말은 그때를 회고하며 마르케스가 했던 것이다. 비단 작가 뿐일까. 나 같은 범인에게도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지 싶다.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내 자신에게 나는 속삭인다. 이 세상에 내게 무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깊은 패배감에 빠지는 것조차 내게는 필요하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별점으로 매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서 자서전에 별점을 매긴다는 게 좀 우습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역자가 역자주를 달기는 했지만 다른 시대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며 인물들에 대한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생소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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