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주제였다. 그건 무척 개인적인 이유 때문인데, 사람들에게서 이기적인 모습이 좋은 모습보다 더 많이 보이고, 나 자신에게서 그 점을 가장 예민하게 느껴서이다. 천사와 악마가 내 양 옆에서 반대되는 말을 속삭이며, 악마의 말은 천사의 말보다 훨씬 달콤했다.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소극적으로나마 할 때면 나 자신이 너무 위선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소설가 이승우의 글을 읽고 위안이 되었다. 오래전 신문 칼럼에 그는 대강 이런 식의 얘기를 썼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했더라도 어찌 됐든 세상에 선한 행위는 이루어진 거라고.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타인은 도움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말이었다. 도움을 받는 타인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따지자면 문제는 또다시 복잡해지겠으나, 그래도 그의 글을 읽은 다음부터는 약간은 덜 갈등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극히 이기적이고 소극적이며 그래서 자꾸만 환대라는 말 앞에서 황홀해진다. 마치 쇼윈도 앞에서 내가 갖지 못하는 반짝이는 구두를 홀린 듯 구경하듯이 말이다.  

    

















철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상적인 제안을 한다. 우리는 한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조건 없이(!) 환대해야 한다고. 여기서 낯선 존재들이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들도 해당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갓난아기의 둘레에 금줄을 치고 함부로 손댈 수 없게 선언하는 것은 사회'다.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들도 절대적 환대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김현경이 이렇게 단언하게 되는 바탕에는 사회에 대한 그만의 정의가 있다.


김현경에 따르면, 사회란 경제적 제도적 문화적 구조의 총체가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상상적 공동체다. 말하자면 '우리'라고 할 때 각자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집단이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성원권 즉 사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다. 상대방이 나의 말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하며 나를 무시할 때 나는 사람으로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은 느낌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의 따돌림 대상이 되는 아이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회에서 배척되는 사람 역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된다.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는 과연 사람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김현경의 말대로,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며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미지적 차원에서부터 거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타자를 환대하는가, 우리 안에 받아들여주는가는 결국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그에게 부여하는 문제이며 우리 안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문제가 된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로 이미 신성하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서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와 우리의 환대가 필수적인 것이다. 이주자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 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 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저, 문학과사상사, 2015, p.69)     


시원을 따져보자면 우리 자신도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 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우리 가족이라는 미시적 사회에 가장 늦게 합류한 존재였다. 가족이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왔다. 김현경의 말이다.    




    




2006년에 출판된 숀 탠의 그림책 <도착>은 이주민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그림책은 실제로 작가의 가족사이기도한데, 숀 텐의 아버지는 1960년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숀 탠은 이 책을 부모님께 헌정했다.)  


표지의 남자는 이상하게 생긴 생명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트렁크를 든 것으로 보아 남자는 여행자다. 실제로 그는 긴 시간 항해 끝에 낯선 땅에 방금 내렸다. 고향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먼 땅에 온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먼 이국에서 언어와 풍습과 기후는 낯설고 남자는 철저히 혼자다. 그이가 느낄 고독과 두려움, 황망함을 작가는 비현실적인 모습의 생명체와 풍경으로 전달한다. 표지의 저 동물이 우리에게 친숙한 개나 고양이가 아닌 까닭이 그래서다.


이방인이 느끼는 심리적 풍경은 불길하고 기이한 그림들로 표현된다. 작가 숀 탠은 이방인이 되어보지 못한 독자를 고의적으로 이런 낯설고 두려운 풍경 안에 밀어 넣었다. 그래야 독자는 이방인의 심경을 마치 자기의 일처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므로. 예술품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이해와 공감도 아는 만큼 싹튼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도착> 속의 인물들은 위로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들도 모두 이방인이었기에 남자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나도 내 고향에서 박해를 받았소, 나도 가족을 떠나왔어요, 일자리를 찾는군요... 글자 없는 이 그림책 속의 인물들은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연민과 이해로 남자를 포용한다. 전혀 모르는 사회에 갓 진입한 남자는 그 땅에 내렸으나 아직 사회에는 발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를 안으로 불러들이며 환대해 주는 그들이 있어서 남자는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지난겨울, 아주 추운 날이었다. 만 사 년째 살고 있던  동네에서 가끔씩 보게 되는 노숙인이 있었다. 그날 횡단보도 맞은편에 노숙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랬다. 우뚝. 그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고 마치 못 박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이가 두렵고 불쌍했다. 혼잣말을 하며 다녔기 때문에 나를 해코지할까 봐 무서웠던 것도 있었고, 어쩌면 인간의 망가진 모습을 본다는 사실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어두운 심연 같은 것, 혹은 인간 존재에 내재된 파국의 가능성을 보는 게 무서웠던 것 같다.        


그이는 분명히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동네 주민은 아니었다. 그가 디디고 선 땅은 서울의 한 지역이었지만 그는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우리'에게 속하지 못한 타자, 사람이지만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다시 김현경의 물음을 떠올린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그 추운 날, 나는 내 행위가 지극히 자기 위안이고 위선적일 수 있음을 또렷하게 의식하면서도 그이에게 보통 사람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걸 선의라고 해야할지, 유치한 감상이라고 해야할지, 횡단보도 앞에서 내 마음은 갈라져 싸웠다. 아무튼 단 몇 분 동안만이라도 그를 평범한 일상을 사는 생활인으로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 순간을 놓치면 두고 두고 후회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서 시럽을 듬뿍 넣어서 횡단보도를 건너 그이에게 건네주었다. 추운 겨울날 뜨겁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 보통 사람이 되시라고. 남자는 마치 평소에도 나와 자주 커피를 주고받았던 사람인 냥, 커피를 받아 들었다. 나는 부끄럽고 당황해서 아직 신호등이 바뀌지 않은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넜다.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까 봐 두려웠다. 내 행위가 왠지 떳떳지 못하다는 수치심 때문에도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이에게서 도망친 그 행위가 오히려 그를 모욕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왜 한두 마디라도 남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노숙자가 아니라도 내 옆의 사람들을 과연 나는 환대하고 있는가를 자문한다. 환대함으로써 그들에게 사람대접을 하고 있는가를. 말을 무시하거나 눈길을 피하거나 무관심함으로써 그들을 없는 사람인 듯 취급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사람다움을 지우는 건 아닌가를. 내 앞의 존재가 사람이며, 그이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김현경은 그것을 상호의례라는 말로 부른다. 상호의례란 상대가 말하고 쳐다볼 때 반응하고 마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안에 끼워주는 일, 우리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일. 상대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해 주는 일이다.


숀 탠의 밀도 높은 그림체 정반대편에서 지극히 단순 소박한 화풍으로 이 절대적 환대의 길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또 한 권의 그림책이 있다.      








얼룩말, 토끼, 기린, 너구리, 박쥐, 거북이가 주인공이다. 다들 토스터에 빵을 구워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거북이는 항상 빵을 태운다. 친구들은 묵묵히 자기 빵을 굽고 식탁에 앉아서 거북이를 기다린다. 거북이 자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거북이가 마침내 탄 빵을 들고 자리에 앉자 다들 자기 빵을 여섯 조각으로 잘라서 서로의 접시에 나눠 담는다. 그들은 그렇게 거북이의 새카만 빵까지 나눠 먹는다. 개성 다른 여섯 조각의 빵조각들을. 절대적 환대란 이런 게 아닐까. 아무 말 없이 둥글게 식탁에 앉아 함께 먹는 일. 이치를 따지고 들어가려면 한없이 어렵고 복잡하지만 환대란 사실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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