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음악 - 음악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제러미 아이클러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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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예술이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연대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해 증언할 의무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아도르노의 이 말을 음악에 특정해서 살펴본다. 음악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본질적인 정신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역사에 무엇인가를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연주자와 청자는 매번 다른 의미를 거기에 더하고 위대한 음악 작품은 그 자체가 대중의 기억을 담은 방대한 보관소가 된다.’ 하지만 음악 속의 기억들을 제대로 들어내는 일은 다른 문제다. 저자는 여기에는 깊은 청취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깊은 청취가 없다면 과거의 목소리를 허공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 사건으로 온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음악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통과하여 깊은 상처를 입은 채로 여기 우리에게 와서 암흑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네 명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예술가가 놓였던 역사적 시대적 상황이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었는지를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역사서와 평전의 중간쯤에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

슈트라우스는 모순적이며 많은 것을 감춘 인물이었는데, 그의 <메타모르포젠>도 그렇다. 그는 독일의 제3 제국 시절에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했고 문화정책 분야에서 나치에 협력함으로써 명성에 영원한 오점을 남겼다. <메타모르포젠>은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에 작곡되었다. 슈트라우스가 깊이 공감하여 음악으로 만든 괴테의 시는 자기 인식의 한계를 토로하는 내용이다. 괴테의 시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네의 전문은 이렇다.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네,

내면의 존재와 멀어지니.

그럼에도 그는 매일 알게 되네,

마침내 바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을.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였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했는지.

 

슈트라우스는 <메타모르포젠>이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밝히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저자는 이 침묵을 청자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 넣어주기를 바란다. ‘요동치는 소리에 새로운 기억을 불어넣고, 음악이 가리키는 범위를 넓히고, 도덕적 관심사의 폭을 넓히고, 슬픔의 각도를 작곡가 주위에서 벌어졌지만 그는 생전에 겪지 못했을 고통으로 향하게 두고 싶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듣고 카를 린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애타게 갈구했던 음악이라고 느꼈다. 이 느낌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이렇다는 것이었다. 쇤베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대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리고 통과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전통에서 멀었던 쇤베르크는 개인적 경험의 결과로서 12음 기법의 불협화음으로 유대인의 고통을 진실되게 표현해냈다.

7분 길이의 이 곡은 쇤베르크가 직접 쓴 텍스트로 작곡되었다. 1부에서는 생존자 역할을 하는 해설자가 유대인 수감자의 참혹한 장면을 설명하고, 2부에서는 남성 합창단이 수감자의 역할을 맡아서 유대교의 주요 기도문인 세마 이스라엘을 힘차게 노래한다. 다음은 1부의 내용 일부이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만 장엄한 순간만큼은 기억한다.

오랫동안 소홀히 했던 옛 기도문을

다들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르기 시작한 순간을. 잊었던 신앙 고백을!

하지만 내가 바르샤바의 하수관에서 오랜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날도 평소처럼 시작했다. 아직 날이 어두울 때 기상나팔이 울렸다.

밖으로 나와! 당신이 자고 있었든 걱정으로 밤을 꼬박 새웠든 상관없다.

당신은 자식, 아내, 부모에게서 떨어져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트럼펫이 다시 울렷다.

밖으로 나와! 하사관이 화낼라!

그들은 나왔다. 늙은 자들과 병든 자들은 느릿느릿 나왔고, 불안해서 잽싸게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하사관을 두려워했다. 최선을 다해 서둘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소음이 난무하고, 분주한 움직임이 난무했다. 그럼에도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

하사관이 소리쳤다. [독일어로]“차려! 서둘러! 내 개머리판의 맛을 보고 싶나”? 좋아, 원한다면 해주지.“

 

합창단이 히브리어로 부르는 세마 이스라엘은 신명기 64~7절의 내용이다: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오늘 내가 너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의 마음에 새겨라.

그리고 너의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하라.

집에 앉아 있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때도.

 

무분별한 폭력과 희생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우려와 회의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그의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같은 음악적 기념물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평소와 다른 청취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 음악에 대해서 우리는 즐기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목격하려고 듣는다. 생존자의 증언, 작곡가의 증언, 죽임을 당할 집단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그 안에서 들어내야 한다.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전쟁 레퀴엠>은 청자가 안이하게 명복을 빌고 위안에 빠지게 허락하지 않는다.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가 그렇듯이 이 곡도 죽은 자를 아프게 기억하게 만든다. 평화로운 고별인사는 어쩌면 그들을 잊기 위한 핑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름다운 음악과 몹시 불안한 음악이 교차하는 식으로 긴장을 끌고 간다. 국가들이 무분별한 전쟁을 멈추지 않는 한, 죽은 자들이 안식하는 평화는 얄팍하고 임시적이고 계속해서 불협화음을 낼 것이라고 브리튼의 음악은 말한다.

한편, 브리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쟁 레퀴엠>을 보편적 진술로 만들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특정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와 같은 회피는 그 자체로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영국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제1차 세계대전보다 의미 있게 다루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무관심하고 반감까지 갖고 있었다. 브리튼의 음악은 자신이 속했던 사회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정직하게 반영했던 것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은 소비에트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예브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에서 영감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바비 야르>를 읽고 나서 뭔가가 되살아났다는 기분이 들었소... 다시 빚을, 양심의 빚을 지게 되었소. 내가 꼭 갚아야 하는 빚이오...<교향곡 13>을 마무리하면 내가 음악가에서 양심의 문제를 표현하도록 도와준 그대에게 크게 고개를 숙이겠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고발이자, 그 사건에 대한 기억까지 억압하고자 했던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음악은 기억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의 음악을 현재로 가져와 연주하고 들으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을 만난다. 음악은 다른 시대가 기록하고 듣고 꿈꾸고 희망하고 애도했던 것을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올바른 세계에 대한 전망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재난의 역사에서 특정한 순간들을 떠올리는데, 이런 기억은 우리가 미래로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가치들을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다. 베토벤의 음악이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에 똑같이 들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깊이 들을 것을 요구한다. 깊이 듣는다는 것은 음악 속에 담긴 과거의 반향을 의식하면서 듣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파울 첼란의 말이 인상 깊다. 파울 첼란은 시가 여전히 시간을 거쳐, 역사를 거쳐-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여-우리에게 온다고 했다. 시간을 통과하여 오는 이 여행에서 예술 작품이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을 수는 없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음악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내 기억하는 것을 우리는 들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일 테다: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그 사이 여러 세기가 입힌 상처를 듣지 않는다면, 여기에 담긴 신실한 이상주의를 그저 기분 좋은 자유의 외침으로 바꾸는 셈이다. 요점은 이런 이상주의를 부정하거나 철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오기까지 (첼란의 표현으로) ‘천 개의 암흑을 지나왔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런 기억은 미래로, 현재의 행동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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