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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ㅣ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3월
평점 :
이 작품은 소설인가, 유서인가. 독자는 묻게 된다. 에두아르 르베는 <자살> 초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며칠 뒤 자살했다. 이 일이 없었다면 <자살>은 당연히 소설로서 읽히겠지만 작가가 실제로 자살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사실에 경악하며 우리는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한다. 도대체 그는 왜 살기를 포기했을까, 아니 더 본질적 질문은, 삶이란 것이 과연 포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다.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이 행동 앞에서 우리는 당황한다. 생명 논리는 절대 진리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자발적 죽음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행동은 절박하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토대가 자발적 죽음에 의해 균열이 생겼으므로.
유서는 자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다. 많은 이들은 죽기 전에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장기적이고 깊은 고통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반드시 유서를 남기지는 않는다. 유서를 남길 수조차 없을 만큼 고통이 극심하거나 충격적이고 급작스럽기 때문에. 드문 경우, 극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장 아메리 같은 이. 그는 <자유죽음>에서 삶과 죽음은 정당하고 고유한 개인의 선택 사항임을 논증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살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자 어렵고 꺼려지는 행동이다. 르베의 죽음이, 그리고 그가 소설을 통해서 남긴 말이, 인간의 이 특별한 행동을 조금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르베는 소설가이자 사진영상작가였다. 작가 소개에 설명된 그의 사진 작업에는 일관된 특징이 보인다. 자신이 영향 받은 예술가들과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어 사진으로 찍은 작업 <동명이인>이라든지, 유럽 도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미국 도시를 촬영한 작업 <아메리카>에는 진짜와 가짜 혹은 진실과 허상에 대한 물음이 전제된다. 작가는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허상을 밝히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인간, 한 도시, 더 나아가 현재라는 시간의 정체성은 모호해서 정확히 규정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 작업들은 출발한다. 르베는 꿈을 현실에서 재구성하고, 공포와 불안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을을 기록했으며, 일상복을 입은 인물들이 럭비 선수의 포즈를 취하거나, 회화를 사진으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했다. 모두 정체성을 문제시하는 작업이었다. 관념과 실체 사이에서 작가는 확실하고 공고한 것을 찾아내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즉, 르베의 사진영상 작업들은 정체성 같은 건 없다는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 확실한 실체란 없으며,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현재성이란 것은 모두 허상이라고. 그래서 그는 반복적으로 ‘진짜’를 비틀어서 ‘복제'한다. 우리는 원본을 알지 못한다, 원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본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의 소설은 그가 다뤘던 허상의 메시지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소재인 삶을 취했다. 혹은 죽음을. 우리의 존재성이 소설의 소재가 된다. 그가 소설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고 며칠 뒤에 자살한 것은 소설에서 주인공의 행위와 정확히 합치한다. 둘 다 계획에 의해 정확히 짜여진 일이다. 스물 다섯 살의 주인공 남자는 테니스복 차림으로 테니스를 치러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서다가 집에 테니스 라켓을 두고 왔다며 도로 집으로 들어가 지하 창고에서 총구를 입에 물고 자살한다. 아내는 밖에서 햇볕을 즐기다가 총소리를 듣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죽은 남편을 발견한다. 현실에서 르베 역시 출판사 편집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살을 예견하게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아내가, 현실에서는 편집자가 자살 현장에 배치된 셈이다. 그의 행동은 무자비했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렇다.
너의 최후는 계획적이었다. 너는 죽음 이후 바로 시신이 발견되도록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너는 시신이 며칠 동안 부패하면서 방치되는 것을, 잊힌 은둔자의 시신처럼 썩어서 발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너는 살아 있는 너의 육체에 폭력을 가했지만, 죽어서는 네가 직접 가한 것 외에 다른 손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시신을 운반할 사람들에게 네가 계획한 방식으로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p.84)
그래서 독자로서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내 첫 감정은 분노였다.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인내와 관용을 아끼지 않았다(p.60)’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아내와 가족, 지인들의 충격보다 자신의 시신이 부패되고 방치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이다. 이런 성향은 소설 전반에 나타난다.
너의 자살은 터무니없이 아름다웠다.(p.21)
너는 단정함에 반하는 세련됨이 우아함의 지나치게 가시적인 버전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너는 이목을 끌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네가 우아하다고 말했다.(p.71)
내가 느낀 분노는 희롱 당하는 느낌과 묘하게 비슷한데, 주인공이 인간적 감정 즉 우리의 사랑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남은 이들의 슬픔을 다만 ‘애석’해 한다. 애석하다는 말 속에는 미안함이 없다. 남은 이들의 고통에 대한 조금의 미안함도 없다.
너는 네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너는 너를 위해 우는 사람들의 슬픔을, 그들이 너에게 보여 주었던,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돌려주었던 사랑을 애석해 했다. 너는 네 아내가 느낄 외로움과 네 지인들이 느낄 공허함을 애석해 했다. 하지만 너는 이 후회들을 상상으로만 느꼈다. 이것들은 너와 함께 사라질 것이고, 오직 네 뒤에 남겨진 사람들만이 네 죽음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너는 자살의 이기적인 측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네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다.(pp.98-99)
그러나 분노의 감정 뒤에는 의문이 있다. 그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라는 의문이다. 주인공은 ‘자살의 이기적인 측면’이 달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는데,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소강 상태가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고통 때문에 죽은 것이다. 고통을 이길 수 없어서. 삶이, 역설적으로, 죽을 듯한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었기에 그는 죽었다.
너는 나이가 들수록 덜 불행해지리라 믿었는데, 그때가 되면 슬퍼도 되는 이유가 있게 될 거라 생각해서였다. 아직 젊었던 너에게 네 고통은 위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네가 보기에는 이 고통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었다.(p.21)
옮긴이 한국화씨는 ‘몸과 마음이 분리된 느낌’을 언급한다. 이 느낌은 나와 낯선 이의 ‘정체성이 합체된’ 느낌이고 ‘현실 감각이 마비된’ 느낌이다. 소설 곳곳에서 주인공의 정체성은 해체되고 떠도는데, 이것은 ‘너’로 지칭되는 주인공과 소설 속 화자의 분할로 드러난다. 이 둘은 결국 한 사람이다. 서로를 남처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으로서 그들은 존재한다. <자살>은 화자인 ‘나’가 죽은 친구 ‘너’를 회고하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죽기로 결심한 ‘나’가 죽은 ‘나’를 돌아보며 대변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이 작품이 소설인가, 유서인가를 묻게 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에두아르 르베는 소설의 화자, 소설 속 주인공, 현실의 나라는 셋으로 분리되어있다. 이 셋은 하나이되 결코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1인3역이다. 유서의 소설화, 소설의 유서화는 그의 정신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체성의 분해라고 밖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상태는 그에게 분명 ‘위로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지 않았을까?
(중학교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에서) 그날 저녁, 너는 한 여자와 대화를 나눴고, 몇 분 동안 다른 곳을 바라봤고, 네가 그를 두 번째로 봤을 때 두 개의 이미지가 다시 뒤섞였다. 너는 옷 두 벌을 가진 인형에게 옷을 입히듯 이 지각의 혼란을 경험하며 저녁 시간의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너는 원한다면 과거의 이미지들을 잊어버리고 상대방이 새로 알게 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네가 과거를 생각할 때면, 그들이 발음한 단어들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속삭임처럼, 꿈에서 나타난 사람이 외국어이지만 친숙한 억양으로 한 말처럼 너에게 다가왔다.(p.91)
현실은 주인공에게 또렷하지 않다. 현실 감각의 부재는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단단한 것, 확실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과거와 미래가 더 현실성을 갖게 되는 이 역설은 일상을 해체시키는 치명적 함정이다. 주인공은 시집에 실린 시들이 제목만큼 좋지 않을까 봐 <지상의 거처>라는 네루다의 시집을 읽지 않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미지의 것들이 알고 있는 것들보다 더 의미 있고, 부조리하고 일관성 없는 삶보다 일관성을 부여하는 죽음이 더 의미 있다(Pp.25-26). 주인공은 원래 있었던 장소보다 새로운 장소에 더 가고 싶어 했지만 그곳에 막상 도착하면 만족하지 못한다. 신기루는 다음 목적지로 옮겨가고, 전에 있던 장소는 멀어질수록 더 아름답게 보인다. 과거는 점점 나은 것으로 변하고 미래는 그를 끌어당기면서 상대적으로 현재는 의미를 잃어간다. 흥미도 의욕도 잃는다. 주인공의 고통은, 아마도 르베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서 유발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너의 삶은 네 자살이 암시하는 것만큼 슬프지 않았다. 사람들은 네가 고통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너를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보다 슬프지 않았다. 너는 공허를 발견할 위험을 무릅쓰고 행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죽었다. 우리는 네가 찾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혹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침묵과 공허라면, 더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 위해서.(p.36)
소설 속 ‘너‘는 행복을 찾기 위해 죽었다. 나는 죽었다는 말 대신 떠났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찾으려고 떠난 것이다. 찾으려던 건 행복이지만 과연 그것이 행복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므로. 죽은 이 앞에서 분노하고 비난하고 따져 묻는 건 무례하다. 비록 그에게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타인의 슬픔을 애석하다는 말로 가볍게 취급한다고 해도, 죽은 이는 삶을 포기했다. 그에게 가장 큰 수수께끼였겠지만 또한 가장 귀했을 삶을 끝내 포기하게 만든 것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기에. 삶에 대한 염오와 실망은 고통의 다른 얼굴일 뿐. 가장 슬픈 사람도 죽은 이일 테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놓아버렸으니까.
죽음 이후에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정일까?(p.19)
그러니 장 아메리의 말대로, 그의 선택은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행위이며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길이기에 그를 경의와 관심과 애정으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고 지켜주는 길이 아닐까 한다. 삶이 완벽하지 않아서 누구는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다. 대개는 그런 고통을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완벽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대신 포기할 수도 있다. <자살>의 주인공처럼. 르베는 길게 유서를 썼다.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이유를. 거기에 약간의 미안함만 있고 너무 많은 자기도취가 있다고 해도 이 글은 고통에 겨웠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슬프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사는 것은 나를 차지하는 일이고
죽는 것은 나를 끝내는 일이다
.....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Pp.1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