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하여 -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하미나 해제 / 돌베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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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는 서문을 자살은 잘못된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이 책은 그에 대해 대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고답은 아니다이다자살에 대해 행해졌던 이제까지의 비난과 눈총과 거리낌은 부당한 것임을 저자는 역사적 궤적과 사유로써 풀어나간다.

 

저자는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행위라고 단정짓지 않고 그럴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살에 대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살자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을 멈추고 연민의 마음으로 대할 것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자살을 설명하는 어휘가 빈약하다자살은 드러내놓고 논의되지 못했고 따라서 명확하게 언어화될 기회를 갖기 못했다. 크리츨리는 우리 사회가 자살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활발하게 하기를 바라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자살이 자유로운 행위라면이것은 삶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시오랑의 희극적 염세주의를 제안한다우리가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시오랑에 따르면죽음 뒤에 더 좋은 게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낙관주의라는 것이다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크리츨리의 다음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중요한 것은 삶을 부드럽게주의 깊게 볼 수 있도록 삶을 정지해 있게 하면서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 느린 형태의 주의를 기르는 능력이다우리는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 더 느린 형태의 주의는 의미가 모호한데본문에 나오는 마음을 진정하고란 표현과 어딘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한다면크리츨리의 제안은 이렇게 다시 쓸 수 있겠다극단적인 폭력 수단을 쓰기 전에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삶을 정지한 채 찬찬히 상황을 바라보며 출구를 찾아보자.


1장은 기독교와 정신 의학에서 자살을 대하는 취하는 편협한 태도에 주목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신이 주신 생명을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죄악이다(하지만 성서에는 어디에도 자살을 금지하는 말이 없다), 한편으로, 정신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 장애이다.


그러나 자살은 이것보다 더 성숙하고 관대하며 성찰적 논의가 절실히 필요한 주제이다. 예를 들자면, 영국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미 17세기에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자살은 신과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타고난 자유다사람들은 가볍게 또는 되는 대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며삶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될 때 삶을 포기한다고 흄은 말한다여기서 문제는 인내의 한계내 생각에인내의 한계는 절대 객관적으로 정해질 수 없으며 철저히 주관적이다사람에 따라사회에 따라시대에 따라 인내의 한계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장은 자살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간략하게 훑는데, 기독교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전, 고대 스토아 사상에서는 자살을 정당한 행위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스토아주의자들에 따르면, 자살은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상태에 작별을 고하는 고결한 태도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살은 하느님의 권력을 사람이 침해하는 죄에 해당한다이 관점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아직도 미묘하게 사람들의 도덕적 사고를 계속 형성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삶이 신(혹은 부모공동체자연적 우주적 질서)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라면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속한다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신이 무한한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은 자신의 피조물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할 때 자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생명 존엄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에 인간의 생명이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연장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자살은 이기적인가살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인가자살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피해 뿐만 아니라 정서적 피해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인데저자는 자살을 무조건 이기적 행위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타인에게 끼치는 피해의 문제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상황 속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강요함으로써 야기되는 피해와 견주어 보아야 한다로빈 윌리엄스가 가족이나 팬들을 위해 살아야만 했을까우리가 도덕적 확실성을 갖고 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3장에서는 자살 유서를 토대로 자살을 분석하고 있는데저자는 자살자가 유서를 남긴다는 점에서 자살이 홀로 죽고 싶어 하지 않는 행동이며 공적이고 공개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살이 강한 자기애에서 비롯되며, 내가 나를 증오해서 일어나는 살인 행위라는 프로이트의 분석도 인용한다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자살 유서의 분량이라든가 범위에 있어서 충분히 연구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의문이다. 

 

4장에서 저자는 다시 자신의 사유로 돌아온다크리츨리는 서문에서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해 보자는 말로 책을 시작하는데, 책의 마무리는 삶의 혹은 인간의 복잡성과 관련짓는다. 즉, 삶과 인간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죽음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칫하면 그 복잡성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은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일관성을 부여할지 모르지만 죽음으로써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에서 복잡성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크리츨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린다울프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자살이 아니다그의 삶의 일관성은 작품에 담긴 용기와 그가 삶에 대해 쓴 것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해제에서 하미나가 말한 대로, 순수히 사유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도 있겠지만, 이런 저런 방향으로 자살을 더 느슨하고 자유롭게 바라보는 장점이 있다. 이런 글도 있어야 다른 글도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자살이란 무엇이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세상의 모든 자살자들과 자살의 사연은 하나로 묶이며 개성을 잃는다. 특히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실하게 잃는다. 그것은 바로 연민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갖는 연민 말이다. 연민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록.

자살에 대하여 -데이비드 흄

자살은 신과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타고난 자유다사람은 삶의 재앙을 맞았을 때 그 해결책으로 자살이라는 방법을 쓸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자살은 신이나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가 아니다불행이 내게 닥친다면 그것도 신의 섭리이듯불행으로 인해 내가 죽기로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뜻이다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생명을 처분하는 것이 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생명을 지키기 위한 행위도 신의 권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범죄가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은 불행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인간의 존재가 연장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린 선과나를 위협하는 불행을 피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한다세네카는 <서간집>에서 말했다자신의 의지 대로 살 수 있는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라. 고통과 슬픔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더는 인내할 수 없어 삶을 포기할 정도라면내게 삶이 주어졌던 것처럼 내가 삶으로부터 소환됐다고 확신한다.

나는 사회에 작은 선을 행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바칠 의무가 없다건강이나 권력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과 사이좋게 지낼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삶이 유지할 가치가 있을 때는 누구도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자살은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다나이나 병불행은 삶에 짐이 될 수 있고존재가 짐이 될 때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별과 용기 있는 행동이다우리 모두는 삶에서 행복할 기회를 누리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사회에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해제 -하미나

하미나의 해제는 이 책과 독립해서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글의 마지막 대목은 크리츨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바라보는 관대하고 열린 태도를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나 더 부드러운 연민의 마음으로 변주한 것처럼 느껴져 여기에 그대로 인용한다자살로 우리 곁을 떠난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이들을 떠올렸다그간 그들의 상실을 아파하느라 그들의 과거마저 너무 슬프게 기억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그들이 피해자였던 것만은 아니다용감한 전사이기도 했다자살을 시행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었겠고 그의 실존적 질문의 답이었을 것이다그것에 관해 따지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그러나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삶도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그들이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내가 기억하고 그들의 영향 아래 살아 있다면 그들도 여전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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