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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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정서를 작가의 것이라고 해야할지, 북유럽의 것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온 포세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고, 북유럽 작가의 글들 역시 많이 소개돼 있지 않아서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은 선입견 없이 작품과 만난다는 점에서 작품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걸작'이니 '진귀한 문학적 위대함'이라는 수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광고를 위해 다분히 과대 포장됐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게 하는 뭔가는 분명히 있었다. 두 번을 읽었다. 이야기의 끝을 보게 만드는 힘, 두 번을 읽게 만드는 힘이 뭔지 궁금했다.  


작가는 인물을 숲으로 이끌고, 막다른 길까지 내몰았고,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했으며, 눈을 내리고 어둠을 내렸다. 인물은 혼돈 속에 갇혔다. 그는 숲이 아닌 마음속에, 절망 속에, 갇혔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인물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나, 하는 아슬아슬함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들었다. 인물이 처한 상황은 사람이 살다 보면 처할 수 있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인물의 끝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내 상황의 끝을 주인공을 통해서 보고 싶었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야기는 결국 신성으로 귀결되었다. 작가는 침묵과 귀 기울여 들음을 통해서 신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음과 신을 주제로 즐겨 삼았다는 소개글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추정해본다.  


솔직히, 돌아가신 부모를 만나고 흰빛과 죽음의 안내자를 만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서구 세계에서는 흔히 이렇게 죽은 이의 영혼이 내세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길을 찾는 주인공에게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한 건 마찬가지"라는 부모의 고백은 진부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새롭지 않다.   


이 소설의 새로움은 그보다는, 단어와 문장을 음악적으로 구사하는 방법, 길을 읽은 자의 마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며 주제를 변주해서 진전시켜 나가는 방식, 그리고 소설 초반에서 주인공의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대담함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 소설의 힘은 도입부에 있는 것 같다. 흰빛과 부모가 등장하는 중반 이후부터 신성으로 귀결되는 전개와 결말은 개인에 따라 선호도가 갈릴 것이라고 짐작된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진전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제기하는 보편성은 삶 자체에 대한 회의와 절망, 신뢰할 수 없는 인간 이성,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해되지 않는 삶의 부조리성, 무한한 사고의 루프, 미로 같은 삶은 숲에서 길을 잃음으로 상징된다. 그 삶은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주인공은 독백한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그렇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하는 한탄을 우리는 살다 보면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또한 자신이 항상 "혼자"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휴식"이었다고. 이 역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그래서 외롭고 지친 사람이 원하는 것은 결국 "고요함"일지 모른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져서 "침묵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은 마치 내 마음만 같아서 주인공에게 나를 이입시키게 된다.

    

작가가 상상하는 신성한 빛의 존재까지 상정하지 않더라도, 어둡고 춥고 막막한 깊은 숲 속에 놓인 당황하고 지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주 조용히 서서,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정적을, 듣는" 일일지 모른다.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경청하는 일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고요함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그 자체로 자족적인 행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듣고 있다. 정적을,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p.59)


여기서 더 나아가, 주인공이 "빛 속으로 들어가 무의 공간과 하나가 되어 순백색 속에서 숨을 쉬는" 결말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내 편견으로 종교적 시선에 대해 지나치게 불편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작가가 형용하고 있는 그 상태는 절대적 평온함, 절대 무의 세계이기에 신성함이라는 말로 밖에는 형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방편적으로 기독교인은 그것을 하느님으로, 불교인은 열반으로 부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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