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죽음 - 죽어가는 사람의 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지음, 한오수 옮김 / 한국융연구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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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심층심리학이 한동안 크게 관심을 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대략 10년 전 즈음 융의 저작 읽기나 연구 모임 같은 것들이 결성되기도 했는데, 어느샌가 관심은 잦아들어서 이제는 너무 조용하다. 대중의 관심은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새 꺼진다. 전폭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는-인류사에 있어서-개인사에 있서서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길어야 백년밖에 못 사는 내가 극히 미미한 변화의 한 토막만을 목격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융의 이론은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고 깊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은근과 끈기라고 하는, 우리 민족의 장점으로 꼽히던 이 두 가지가 말이다. 


융의 이론은 방대하고 깊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만 있지 않고, 각각의 길 또한 깊고 복잡하게 이어진다. 문외한으로서, 그의 전집을 다 읽어보았다. "다 읽었"지만 대략적으로도 "이해"했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감만 잡은 정도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매번 같은 궤도만을 돌고 돌아 다람쥐 쳇바퀴에 갇힌 것 같던 사고의 틀 속에서 아주 미세한 방향 전환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융을 읽은 덕분이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는 융의 학문적 동지이자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융의 그늘 안에만 머무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 <꿈과 죽음>은 죽음을 현대인의 꿈과 신화적 상징들, 연금술, 그리고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쓰여진 책들이 여럿 출간돼 있지만 이 책은 소재와 분야와 학문적 깊이 면에서 신선하고 진지하며 믿음직하다. 하지만 읽기가 만만치 않다. 연금술 같은 지극히 생소한 내용들을 번역해낸다는 것이 절대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번역자에겐 굉장히 죄송한 얘기지만-가독성이 떨어지는 데에는 번역 자체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것을 정리하자면:


1. 꿈은 인간의 무의식을 보여주며, 우리의 본능과 본성의 소리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저자의 요점은, 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무의식적 정신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도 우리의 심혼의 삶(영혼의 삶이라고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은 지속되는 것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아주 분명하게 사후의 삶을 믿는다.(p.10)


2. 고대이집트를 비롯해서 여러 고대 문화에서는 사후의 세계와 관련해 유사한 상징적 표상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를테면 나무나 풀, 곡식, 꽃, 물과 불, 결혼식 등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죽음을 넘어서 지속하는 생명의 상징들이다.       


이집트인들의 경우에, 오시리스는 서쪽에 사는 자이고 서쪽은 사후세계를 의미하며 그의 시체가 들어있는 석관은 죽은이가 사후에 다시 재생할 것임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한마디로, 오시리스는 인간에 내재하는 영원한 부분을 의미한다. 


영혼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이고 대화의 자리에서 이 단어를 꺼냈다가는 분위기를 한순간에 썰렁하게 만들기 십상인데, 사실 우리는 영혼에 대해 혹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 직면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는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용감하며 지혜로웠던 것 같다. 과학은 현대인들을 물질적인 면에서 매우 풍요롭게 해주었으나 정신적으로는 극히 빈곤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3. 죽음은 삶(!)의 과정이고 따라서 죽음이 삶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도 말했듯이, 이것은 그저 심증일 뿐 아직까지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죽음 또는 죽음 이후는 우리에게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신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듯이, 죽음 이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후세계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현재의 삶을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소멸의 길로 나아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지속적인 상승의 길, 성장의 도상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혼의 성장 말이다. 


일상의 자아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크나큰 불행과 재난이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파탄냈을 때, 우리는 일상의 균열 사이로 언뜻 시커먼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때 우리는 결단한다. 눈을 감아버릴 것인가, 직면할 것인가. 요동치는 어두운 감정들을 외면하고 피하는 대신 온전하게 느끼면서 통과한다면, 깨어진 일상을 서둘러 수습하는 대신 한동안 그대로 놔두면서 그 균열 사이로 드러나는 미지의 어둠을 직면한다면, 우리는 조금 달라질지 모르겠다. 

일상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될 테니까 말이다. 삶의 실체는 죽음과 한 쌍이며, 그렇다면 삶을 살고 있는 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제기할 때가 곧 영혼의 문제를 꺼내야 할 때일 것이다. 영혼의 문제가 주제가 되는 낯설디 낯선 그 세계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결단해야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를.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모르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길을 통과해야 한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융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융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라고 하면서,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융에 따르면, 그 답은 죽음에 관한 신화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이성은 그에게 어두운 무덤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화는 죽음의 땅에 있는 다른 상들, 즉 유익하고 풍요로운 삶의 상들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상을 약간이라도 신뢰한다면 그는 그 정도만큼 옳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만큼 옳지 않다. 

죽음의 신화를 부정하는 사람은 무(아무것도 없음)로 다가가지만 부정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삶의 발자취를 좇는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불확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자신의 본능에 반하고, 후자는 본능과 더불어 함께 한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가 있고 후자에게는 득이 된다.(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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