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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화자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한 여자다. 그녀는 과거에 교사였지만 삶은 점점 나빠져 지금은 요양 보호사로 힘들게 생계를 꾸린다.
그녀에게는 서른이 넘은 딸이 있다. 남편 없이 혼자 키운 딸은 공부 잘하는 똑똑한 자식이었으나, 지금 시간 강사로 전전하며 힘들게 살고 있고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사회에서의 자립을 극단적으로 힘들게 만들고 있다. 딸은 파트너와 같이 엄마 집에서 거의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여자가 돌보는 젠이라는 치매 노인은 과거에 사회 봉사 분야에서 꽤 화려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지금은 홀홀단신이다. 젠의 비참함을 보며 여자는 화가 난다. 왜 '상관도 없는 남'을 보살피느라 자기의 젊음을 소비해버렸는지. 그녀의 분노는, 선의가 고마움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다움이 외면받는 이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제목처럼 '딸'에 대한 이야기일까? 작가는 딸이라는 단어로 암시하는 것들, 가령 모성의 이야기, 여성의 이야기만을 이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일까? 레즈비언 딸의 이야기가 중요한 축을 이루기는 하지만 주인공 화자의 혼란스럽고 비참한 마음은 삶에게 배신당한 자의 그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내가 들어와 사는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 때문에 절망스럽다. 그녀에게 삶은 고달펐고, 딸은 나처럼 힘들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 하나로 그 삶을 버텨왔을 것인데, 딸의 현재 모습은 자기가 꿈꾸던 것과는 너무나 멀다. 이제 젠이라는 치매 노인이 처한 비참함은 자신과 딸의 미래처럼 보인다.
상관도 없는 남을 보살피는 고귀한 삶을 살아낸 치매 노인의 선의는 무참히 잊혀지고,
익숙한 기존 삶의 방식이 딸의 동성애로 무너진 지금,
삶을 지탱해주는 이 두 기둥이 흔들리면서 그녀는 절망한다.
그녀는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는 대목에서, 발을 접질린다. 다분히 상징적이다.
결국 그녀는 치매 노인을 집으로 데려와, 인생 마지막 시간들을 인간답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이것은 이기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그녀가 노인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는 것은 노인이 자신과 딸의 미래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관도 없는 남'을 돌본 한 인간을 역시 '상관도 없는' 자신이 돌봄으로써 선의가 보답받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첫번째 기둥을 바로 붙잡았다.
딸과 딸의 파트너에 대해서도 그녀는 아마 결국은 용납하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에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데, 태고 적부터 분명 존재했을 어떤 삶의 방식(이를테면 동성애 같은)이 여전히 질병처럼 취급받는 것도 실은 역사적으로 새로울 게 없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정말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삶은 이해가 아니라 용납할 수 없기에 어려울 때가 더 많다. 너무 낯설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는 되나 용납은 되지 않는 삶 앞에서 그럼에도 인간다움을 꼭 붙들고 지켜내는 것이 부조리한 삶의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실마리라는 것-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읽었다. 작가의 의중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으나.
* 하지만 이 소설이 온통 여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남자는 드물게만 출연하고 부정적인 작은 역할만을 맡고 있다. 여성 화자의 시선은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정의하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고,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류 여성들 역시 하나같이 공감의 바탕 위에서 움직인다.
작가는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여성성 속에 오롯이 잠겨들고 싶었던 걸까? 여성성이든 남성성이든 양날의 칼인 것은 분명한데, 여성성의 경우에는 세상과 타인의 일이 모두 나라는 개인 속으로 함몰되는 것 같은, 이를테면 객관이 객관으로 있지 못하고 모두 주관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타인들도 화자의 개인적 감성과 사유에 물들어서 모두 한 인물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