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담의 심층 - 그림 동화와 함께 읽는 융 심리학
가와이 하야오 지음, 고향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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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왕에게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너무 오만해서 구혼자들을 비웃고 퇴짜를 놓았다. 왕은 급기야 딸에게 너무 화가 나서  거지에게 딸을 주겠다고 맹세해버렸다...

 

어느 나라에 왕에게 황금 사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매일 하나씩 사과가 사라졌다. 왕은 누가 사과를 훔쳐가는지 조사하라고 세 아들에게 차례로 지시했다. 왕은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믿었지만 세째는 얼간이라며 무시했는데...

 

첫번째 이야기는 <지빠귀 부리 왕>의 시작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수수께끼>의 시작이다. 오만한 공주는 마지막에 가서는 사회 밑바닥까지 추락해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녀의 곤궁한 상황은 남이 베풀어주는 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구도자의 그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그렇다면 공주의 사회적 추락은 그녀가 내적인 구도 과정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의 오만함으로 인해서 극도의 수치를 맛보았을 때 비로소 내가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민담은 이렇게 이야기로써 전달한다. 마치 내 무의식이 내 내면의 일면들을 인물로, 사건으로 꾸며서 꿈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듯 민담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적 풍경과 내적 성장에 대한 힌트를 이런 식으로 말해준다.    

 

민담의 심층을 살펴본다는 것은, 표면의 이야기 아래 흐르는 내면의 이야기를 읽는 일이다. 나의 오만함은 공주의 그것만큼이나 불쾌한 것이었다는 깨달음, 나의 어리석음이 때로는 잘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지혜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민담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얻게 된다.

 

정신분석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면 민담의 심층을 읽기가 극히 힘들다. 저자의 분석을 읽으면 아하, 하는 지점들이 있지만 그 전까지는 민담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수백년을 이어왔다면 거기에는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지만 민담을 읽고 듣는 내면에서는 뜻밖의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심리적인 정화가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감지하고 이 이야기들은 대를 이어서 전달했던 게 아닐까.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듯,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고이 간직하듯, 귀한 것을 다음 세대로 소중하게 전달하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민담의 역사를 받쳐주고 있었던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앞서 두 이야기의 주인공을 비롯해서 민담의 주인공들은 너나 없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정체된 지금의 나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실제로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다면, 혹은 새로운 책, 새로운 영화, 새로운 음식을 갈구한다면, 그것은 내 심리적 상황이 정체돼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절실해진 상황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민담의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처럼 만약 내가 정체되어 있다면, 저자의 권유대로,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래야 민담의 이야기처럼 나의 이야기도 어딘가로 이어지며 '만들어'진다. 

 

한 고개를 넘으면 다음 고개가 나오고 한 강물을 건너면 다음 강물이 나오는 것처럼 삶은 진짜로 이런 길, 곤경이 자꾸만 나를 막아서는 길을 걸어가는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안소니 퀸이 나오는 <라 스트라다>라는 영화가 바로 이 '길을 가는 인생'을 다뤘다. 주인공 사내는 실제로 떠돌이다. 사내는 우연히 백치 여자를 만나 그녀를 데리고 다니게 되는데, 여자가 죽자 그제야 사내는 자기가 그 여성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운다, 뜨겁게... 이 이야기 역시 알고 보니 민담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른 것이었다. 바보 같아 보이지만 순수하고 부드러운 여성(나의 영혼)을 천대하고 구박하며 비웃는 사내는 어쩌면 오만하고 거칠고 메마른, 이성적으로만 발달돼 있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성공에 의기양양해하는, 나의 일면일지 모른다.   

  

- 가와이 하야오의 민담 분석은 융의 정신분석 이론에 근거하고 있어서 원형이라든지 그림자 같은 융 심리학의 기본 개념을 어느 정도 알고 읽으면 그의 해설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가와이 하야오의 <판타지 책을 읽는다>, <어린이 책을 읽는다>는 나의 애장서다. <민담의 심층>과는 또다른 색깔의 문학 분석을 이 두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 그림동화 완역본을 번역한 김열규 선생님. 대학 시절, 선생님의 민담 분석 수업을 정말 재미있게 들었더랬다. 가와이 하야오도 본문에서 두어 번 언급한 막스 뤼티의 <유럽의 민담>은 수업의 참고 도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줄을 치며 맛있게 읽었던 작은 문고판을 누군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은 보림에서 예쁜 장정의 작은 책으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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